취업 준비/회사

57 - 컴퓨터 배송 (첫 퇴사 생각)

하얀 얼굴 학생 2025. 4. 1. 19:21

 사업지원팀 하얀 얼굴 사원. 여기저기서 날아든 전염병 검사 증빙으로 전표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V 차장이 그를 부른다.

 

  V 차장 : 얼굴아

  그 : 네!

  V 차장 : 이따가 아마 사업부장님께서 PC 배송하라고 시키실 수도 있어. 어디로 보내야 된다고 하시는데, 주소 정확히 해서 알려주신다고 했거든. 지인한테 보내시는 거 같아. 오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일단은 알아두라고

  그 : 네 감사합니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V 차장의 예언이 맞았다.

 

  사업부장 : (자리에서) 얼굴아

  그 : 네! (후닥닥 달려간다)

  사업부장 : 이거 PC 쓰고 남은 건데, 활용할 데가 있다고 해서 오늘 배송을 좀 보내야 하거든. 주소는 여기 이 주소로 보내면 돼.

  그 : (주소를 건네받으며) 알겠습니다!

  사업부장 : 이런 거 부탁해서 미안해~

  그 : 아닙니다!

 

 

 보내야 할 물품은, 컴퓨터의 본체 부위다. 본체를 가지고 나오며, 그는 사업부장에게서 받은 주소를 읽는다. 도 단위 행정구역을 몇 개 건너가야 도달할 수 있는 위치다. 이 주소로 배송을 보내야 한단 말이지. 그는 개인적으로도 택배를 활용해본 적이 별로 없다. 긴장부터 하는 그다.

 

  그 : 다녀오겠습니다!

  V 차장 : 어떻게 들고 가려고? 무거우면 택시 타고 가

  그 : 가까워서 괜찮습니다!

  V 차장 : 그래?

  그 : 네, 다녀오겠습니다!

 

 

 때는 햇빛이 따사로워 어느덧 반팔을 입기 시작한 초여름, 그가 PC를 어깨에 들쳐매고 나온 시각은 점심 직후인 오후 1시~2시 경이다. 나이가 서른이지만 경력 없는 쌩신입, 그래서 마인드만큼은 파릇파릇한 신입사원인 그다. 건강한 신체와 다리가 있는데, 택시비로 회삿돈을 낭비할 쏘냐. 우체국으로 향한다. 

 

 힘차게 시작하였으나, 걸으면 걸을수록 어깨 위 PC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진다. 무게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PC는 어깨를 이탈하며 슬금슬금 빠져나오기 일쑤다. 결국 한번에 가지 못하고, 두세 번 어깨에서 내렸다가 올리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괜찮다. 그는 따사로운 햇빛과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한다.

 

 

 우체국에 도착한다.

  그 : (땀을 닦으며) 안녕하세요

  우체국 직원 : 안녕하세요

  그 : 이 PC를 택배 보내려고요.

  우체국 직원 : PC에요? 어디로 보내시려고요?

  그 : (종이를 보여주며) 이 주소로요

  우체국 직원 : 근데, 이대로 가져오신 거에요?

  그 : 네.

  우체국 직원 : 이대로는 못 보내요. 차에 실어서 가는데, 다른 택배들이랑 같이 실리고 파손 우려도 있어서 PC는 특수 포장을 해야해요.

  그 : 여기서 특수 포장을 해주시나요?

  우체국 직원 : 저희는 없어요. 큰 데 가셔야 해요.

  그 : 어디로 가야 하나요?

  우체국 직원 : OO역 쪽 큰 우체국에는 있는 걸로 알아요.

  그 : 아... 감사합니다.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땀을 닦으며, 그는 핸드폰으로 지도 검색을 한다. OO역 우체국에 전화를 건다.

 

  신호음

  OO역 우체국 직원 : 네 우체국입니다

  그 : 안녕하세요. PC를 배송하려고 하는데 특수 포장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특수 포장해주시는 데가 있나요?

  OO역 우체국 직원 : 네 우체국 방문하시면, 한쪽에 포장해드리고 있습니다,

  그 : 가격이 얼마나 되나요?

  OO역 우체국 직원 : 잘은 모르겠는데... 한 3,000원 정도일 거에요.

  그 : 지금 가도 특수 포장이 가능한가요?

  OO역 우체국 직원 : 네 우체국 운여  시간 동안 가능합니다.

  그 : 아, 감사합니다!

 

 

 그가 지금 있는 우체국에서, 목적지인 우체국까지 도보로 검색하니 1시간이 나온다.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기도 조금 애매한 위치다. 그는 별 수 없이 V 차장에게 전화를 한다.

 

  V 차장 : 어, 왜

  그 : 네 차장님. PC 배송하려고 우체국 왔는데, 특수 포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특수 포장은 여기서는 안되고, 큰 우체국으로 가야한대요. OO역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택시를 타고 될까요?

  V 차장 : 어 그래, 택시 타고 다녀와.

  그 : 빨리 갔다오겠습니다.

  V 차장: 천천히 와도 돼

 

 

 앱으로 부른 택시가 도착한다. 그는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그의 회사는 서울에 있긴 하지만, 서울 중심부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위치다. 택시가 큰 역으로 나가자, 역과 쇼핑센터 부근에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이를 보며, 그는 마음도 이상하게 싱숭생숭해진다. 싱숭생숭하긴 한데, 어딘가 한구석에 찜찜함이 섞인 느낌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는 PC를 들고 우체국 내부로 향한다. 우체국 구석 쪽에, '특수 포장'이라고 붙여놓은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은 있는데, 사람은 없고 연락처만 붙어 있다. 그는 연락처로 전화를 건다.

 

  목소리 : 네 전화받았습니다

  그 : 아, 안녕하세요. 특수 포장하려고 왔는데요.

  목소리 : 아, 잠시만요. 지금 가겠습니다.

 

 얼마 뒤, 전화기 속 목소리의 주인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약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성. 얼굴과 코가 넓적하고, 손가락이 뭉툭하고 굵다. 목소리도 굵다.

 

  특수 포장 사장 : 어떤 물건 포장하시죠? 아 PC네

  그 : 네 맞습니다.

  특수 포장 사장 : 자 여기로 주시면, ... ...

 

 특수 포장 사장은, PC 크기를 잰 뒤 일정 부분 여유를 두고 박스를 재단한다. 칼과 쇠 자를 가지고서 박스 쪼가리 여럿을 이리저리 자른다. 접히는 부분은, 힘조절을 하여 완전히 자르지 않고 칼집만 낸 뒤 접는다. 박스가 완성되자, 사장은 안에 쿠션 작용을 할 여러 완충재와 PC를 함께 넣는다. 공간이 남아 안의 물건들이 돌아다니지 않도록,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채워넣는다. 내용물이 채워진 박스는, 사장의 현란한 손놀림 아래 온몸이 테이프로 코팅된다. 그는 넋을 놓고 바라본다. 달인의 진기명기 쇼를 보는 느낌이다.

 

  특수 포장의 달인 : 주소가 여기라고요?

  그 : (홀렸다가 깨어난 듯) 아, 네!

  특수 포장의 달인 : (완성된 박스에 주소를 한번 더 적어넣고는) 네, 다 됐습니다.

  그 : 아, 얼마인가요?

  특수 포장의 달인 : 2,300원 입니다.

  그 : 감사합니다.

 

 그는 달인의 작품을, 접수처로 가져가서 접수한다. 검증된 달인의 특수 포장을 덕인지, 우체국 직원은 군말 없이 배송 접수를 끝마친다. 

 어떻게 돌아갈까. 그는 V 차장의 말대로, 택시를 타고 돌아가기로 한다. 그것이 더 편해서가 아니라, 빨리 회사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회사에서 나온 시각이 약 1시~2시 경이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5시를 넘겼다. 물론 그가 한 일들이 어려운 업무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미숙함으로 인한 것인지, 시간을 꽤나 잡아먹었다.

 여기저기 들르고, 알아보고, 전화하고, 택시를 부르고 기다리고, 이동하고, 특수 포장에 전화하여 기다리고 포장하고, 또 접수한 뒤 택배를 보내고.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길, 그의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이렇게까지 오래 자리를 비워도 되는 것인가. 무엇보다, 오늘 그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한 것인가?

 

 회사 도착

  그 : 다녀왔습니다~

  V 차장 : 어 고생했어~

 

 S 팀장, V 차장, T 과장, U 과장 모두 바쁘다. 자리에 없는 이도 있고, 자리에 있더라도 제각기 자신들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어느덧 시간은 6시를 향해 가고 있다. 반쯤 열린 사업부장실 문틈으로 황금빛이 새어져나오고 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90% 이상의 창문들을 모두 블라인드로 가려버렸다. 사업부장 등 임원실의 창문들만이 블라인드로부터 자유롭다. 사업부장은 이미 퇴근한 듯하다. 인기척 없는 사업부장실에서 황금색 노을빛만 뿜어져나오고 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걸까. 오후 내내 PC 배송만 처리하다가 들어와서 그랬던 것일까. PC 배송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였을까. 관심? 정말 그것 때문인가? 만일 모두가 그에게 고생했다고 관심을 가져줬다면. 그랬다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아니면 회사 생활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을까? 그는 지금 이 회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파릇파릇한 입사 5개월차 신입사원. 사업부장실 창문 너머 황금빛 노을을 바라보며, 그는 처음으로 퇴사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