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 공놀이 행사 2 (하지 마)
그는 솔직히, 공놀이 행사를 가는 것이 설렜다. 사무실에 틀어박혀 전표만 치다가, 몸을 움직이고 운동을 하러 간다니 그저 기분이 좋을 따름이었다. 그는 원래 공놀이를 좋아한다. 공놀이를 하며 새로운 사람들과 팀을 맺고 또 새로운 팀을 상대하는 것에서 은은한 재미를 느끼곤 했다. 비록 회사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아닌가. 회사이기 때문에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공놀이를 하고 땀을 흘리면 더 빠르게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티 없이 맑은 신입사원인 그다.
공놀이 행사를 위해, 원래 퇴근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퇴근하여 체육관으로 향한다. 도착하니, 그가 공놀이를 하러 돌아다녔던 여느 체육관과 다를 바 없다. 공놀이가 아주 허울은 아니구나. 그는 넓은 공간을 보며 가슴이 뛴다. 복장을 갈아입고, 몸을 풀기 시작한다. 다른 직원들도 도착하여 몸을 풀고 있다. 그는 공놀이장에서 언제나 그래왔듯, 은근히 주변을 스캔한다. 저 사람은 풍겨지는 아우라가 공놀이를 꽤 잘할 것 같은데. 저 사람은 공 다루는 것을 보니 고수는 아닌 것 같은데.
몸을 푸는 이들의 공소리에 체육관이 꽤 요란해질 무렵, 회사의 높으신 분이 도착한다. 높으신 분 뒤에는 인사팀이 줄줄이 따라오고 있다. 인사팀 직원 중에는, 공놀이를 전혀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복장도 여럿 보인다. 복장에 관계없이 인사팀은 거의 100%가 공놀이 행사에 참여했다.
인사팀 직원 : 네, 다들 모여주세요! 팀별로 일렬로 서주세요!
(모두 모인다)
인사팀 직원 : 네 안녕하세요. 이렇게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이렇게 공놀이 행사를 하게 되었네요. 다들 다치지 않도록 부상에 유의해서, 즐겁게 같이 하도록 해요. 화이팅 한번 외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일동 : 화이팅!
인사팀 직원의 진행 아래, 공놀이 행사가 시작된다. 4개 팀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경기를 치러, 1~4위를 가리는 방식이다. 딱 봐도, 높으신 분이 속해있는 팀의 전력이 상당하다. 신체적으로도, 풍기는 아우라도 다르다. 하지만 그는 기죽지 않는다. 그는 선천적으로 일종의 반골, Underdog 기질이 있다.
높으신 분이 속한 팀은, 무난하게 이겨서 승자전에 진출했다. (높으신 분이 직접 뛰진 않았다) 이번에는 그가 속한 팀이 경기하여 승자전 진출 팀을 가릴 차례다. 상대팀에는,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던 관리팀장이 속해있다.
1차전
경기가 시작되고, 그는 몸으로 부대끼며 뛰기 시작한다. 그에게는 화려한 스킬이나 기교 따위가 없다. 벌써 공놀이를 한 기간이 10년이 넘었고, 그도 화려한 스킬 같은 것을 동경하고 연습했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스킬과 기교와는 연이 없는 모양이다. 피나는 노력을 한다면 획득할 수야 있겠지만, 그는 공놀이 선수가 아니지 않은가. 결국 그는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회귀한다. 바로, 몸과 힘으로 들이받고 체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비효율적이더라도 더 많이 움직이고, 악착같이 달라붙어 상대방의 힘을 빼놓는 방식. 언젠가 그도 나이가 들고 신체가 꺾이면 이 방식을 구사할 수 없겠지만, 아직까지는 신체가 버텨주어 유효하다. 그리고 이 방식은, 이 날의 '공놀이 행사'에서도 제대로 먹혀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는 취미로라도 10년 넘게 공놀이를 해왔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건강을 신경 썼으며, 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바로 공놀이였다. 이렇게까지 꾸준히 운동을 하는 이는, 특히 직장인 중에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상대팀 직원들의 숨이, 슬금슬금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한다. 반면에 그는 이제 막 몸이 풀린 참이다. 모든 운동의 근본은 결국 체력이다. 그가 속한 팀이 승리한다.
1차전이 끝나고, 그는 자신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던 관리팀 팀장을 찾아간다. 비록 같은 팀이 되지는 못했지만, 상대팀으로써 경기를 했고 또 나름 반가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응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그 : 팀장님 안녕하세요!
관리팀장 : 어...
그 : 아까 저 블락 당했어요! 팀장님 아니셨어요?
관리팀장 : (듣는 둥 마는 둥) ...
상대팀 1인 : ... 그걸 굳이 여기 와서 말할 필요가?
그 : (???)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해, 그는 자신의 팀 쪽으로 되돌아온다. 후에 돌이켜봐도, 그는 이때의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경기의 승패가 그만큼 중요해서인가? 공놀이 경기 내용이나 분위기를 미루어보았을 때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다 같이 기분 좋게 뛰고, 기분 좋게 마무리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아무튼 그는 이 뒤로, 굳이 다른 이들에게 가서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2차전
1차전에서 이긴 팀끼리, 진 팀끼리 순위 결정전을 한다. 그의 팀은 1차전을 이겼으니 이미 2위 확정이다. 승자전의 상대팀은, 높으신 분이 속해있는 정예팀이다. 정예팀에는 회사 밖 동호회에서 공놀이를 지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여럿 포진해 있으며, 피지컬도 좋다. 이미 짜여진 각본, 우승은 정해져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가 속한 팀의 팀원들도, 이 정도면 충분히 선방했다는, 2위 정도면 만족한다는 눈치다. 이런 분위기가 무겁게 짓누를수록, 그의 언더독 기질이 끓어오른다. 이기고 싶다. 만일 질 수밖에 없다 해도, 쉽게 져주진 않겠다. 그 혼자만 눈동자를 불태운다.
승자전이 시작된다. 높으신 분의 팀은 확실히 정예로 이루어진 팀이다. 그의 팀에 비해, 저쪽 팀의 기초 체력과 공놀이 실력이 모두 높다. 그가 에이스를 도맡아 마크하긴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에이스가 패스를 하는 족족 여기저기가 뻥뻥 뚫린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쪽으로 수비 지원을 가면, 상대팀 에이스는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다. 결국 그의 팀은 참패한다. 끝나고 인사를 나누면서 그는 상대팀 에이스의 정체를 알아낸다. 에이스의 직급은 과장이다.
팀 조정
경기는 졌지만, 끈덕지게 달라붙은 그의 노력은 나름 인정을 받았는가. 계속해서 경기를 지켜만 보던 높으신 분이, 드디어 입을 연다.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 저기, 이제 팀을 좀 조정해. 이러면 밸런스가 안 맞잖아. 이렇게이렇게 한 팀 하고. 이렇게이렇게 한 팀. 이 친구 이쪽으로 오고. 나는 여기서 뛸 거야
3차전
높으신 분의 한 마디에, 모두의 팀이 재조정됐다. 그는 이제 정예팀의 에이스(과장)와 같은 팀이다. 높으신 분은 상대팀이다. 에이스 과장 입장에서는, 높으신 분 팀에서 방출됐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3차전에서는 높으신 분이 직접 뛴다고 한다. 어디, 높으신 분의 실력 한번 봐볼까. 밀착 마크를 붙어볼까. 높으신 분의 나이가 많긴 하지만, 공놀이 경기에서는 모두가 평등하지 않은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그다. 에이스 과장은 이런 그를 눈치챘나 보다.
경기가 시작된다. 높으신 분이 함께 뛰니, 기류가 이상하다. 다들 뭔가 쭈뼛쭈뼛, 제대로 수비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공놀이하는 이들이 모두 이상하게 조심스러운, 그리고 밖에서 바라보는 인사팀 직원들이 유난히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애초에 운동이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어렸을 적 공놀이를 하다가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모 지구대 경찰대원들과 함께 공놀이를 할 때였나. 그때도, 득점할 찬스에서 이상하리만치 한 명에게 공을 몰아주는 상황이 반복됐다. 어린 그는, 모두가 공을 몰아서 주는 저 사람이 아마 지구대의 대장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경기가 중반에 접어들고, 높으신 분이 또 공을 잡는다. 득점하기 좋은 위치다. 동시에, 그가 수비할 수 있는 위치다. 이대로 계속 뜨뜻미지근하게 실점하다가는 맥없이 진다. 그가 눈동자를 불태우며 달려드려는 그때, 바로 저편에 에이스 과장이 보인다. 짧은 찰나, 에이스 과장은 그에게 입모양으로 말한다.
- (하지 마. 하지 마)
- (하지 마요?)
그는 수비를 달라붙지 않는다. 높으신 분의 팀이 승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