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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조각글

배탈 난 돼지

그가 다니던 유치원은 요일마다 정해진 시간표가 있었다. 

 

 월요일에는 이걸 하고, 화요일에는 저걸 하고, 수요일에는 또 뭘 하는 식이다. 무슨 요일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날은 유치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의 연극 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동물 그림을 코팅해서 나무 젓가락에 붙여 놓고, 그 동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로 연극을 했다. 작은 상자 같은 것을 무대로, 나무 젓가락 인형을 잡고 손만 내밀어 흔들며 목소리를 흉내내는 연극이었다. 햇빛이 따뜻하게 비췄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 아이들 모두가 무조건 한 번씩은 역할을 맡아 연극을 해야 했다. 유치원생을 위한 동물 이야기 5개 정도였고, 그는 무난했던 이야기의 무난한 강아지1 같은 역할을 맡아 끝냈다. 어차피 해야 했는데 먼저 끝내버리니 속이 후련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다른 친구들이 연극하는 것을 앉아서 구경하며 시간만 보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일이 터졌다. 문제가 된 연극의 이야기는 '배탈 난 돼지' 였다.

 동물 친구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돼지는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던 나머지 계속해서 먹다가 배탈이 나 버린 것이다. 배탈이 난 돼지는 병원으로 찾아갔고, 염소 선생님 앞에서 배가 아프다고 데굴데굴 굴렀다. 염소 선생님은 '에잉 쯧쯧 맛있다고 그렇게 많이 먹으면 안돼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돼지는 후회하며 약을 받아 온다는 이야기였다.

 

 선생은 역할을 배정하기 시작했다.   

"염소 선생님 하고 싶은 사람? ... 아이스크림 파는 OO 하고 싶은 사람? ... ... " 

 

그리고 돼지 역할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돼지 역할 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돼지 역할 하고 싶은 사람? ... 돼지 역할 하고 싶은 사람? ... 아무도 없어??"

 

 애시당초 생각해보니 순수한 유치원생이 자기 잘못으로 배탈 난 돼지라는 한심한 역할을 자원할 리가 없었다. 선생의 목소리 톤은 높아지고 점점 짜증이 섞여가는 것 같았다. 선생의 묻는 소리 외에는 다들 정적이었다. 이 연극이 마지막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 연극에 참여하지 않은 아이들이 대여섯 정도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그는 괜시리 그 아이들이 미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선생님의 독촉은 계속됬다.

 

"아무도 없어? 돼지 누가 할거야?"

 

"저... 제가 할게요...!"

 

 정신을 차려보니 그였다. 그가 배탈 난 돼지 역할을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이미 역할극을 끝냈으므로 참여할 의무가 없음에도 손을 든 것이다. 선생님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래 너가 하라며 연극을 시작해버렸다. 그는 속으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왜 손을 들었을까. 이런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역을 굳이 내가 나서서?'

 

지금 생각해보면 이 상황을 타개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리라는 영웅심리와, 그가 어렸을 적 몸무게가 꽤 나가서 돼지라는 말을 종종 들었던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한다.

 바보같이 손을 들었음으로 꼼짝없이 배탈 난 돼지 역할을 해야 했다. 돼지 그림이 붙은 나무막대기를 들고 연극이 시작됬다. 대사는 '우와 아이스크림 너무 맛있다 냠냠 / 또 먹어야지 냠냠 / 어욱 배가 아파 우우욱 / 선생님 배가 너무 아파요 우욱 / 선생님 어서 빨리 치료해주세요' 따위였다. 연극이 시작됬다. 처음 몇 대사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염소 선생님한테 찾아간 이후부터 그는 대사를 하기가 싫었다. 당연히 대사가 제대로 안 나오고 그의 목소리도 기어들어갔다.

 

선생은 이를 지적했다.

 "크게 제대로 말해야지!"

 

 그는 눈 딱 감고 억지로 크게 대사를 하며 돼지 인형을 흔들었다..

"아이 선생니임 빨리 고쳐주세요오~" 

 

 그가 듣기에도, 대사를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심히 불편하고 거슬렸다.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오버할 때 나오는 그런 목소리였다. 유치원생이었으므로 표정 관리도 안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간신히 '배탈 난 돼지' 연극이 끝났다. 그는 왠지 모를 수치심과 짜증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친구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지 않은 것 같다는 안도와 함께, 내가 너희를 위해 희생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며 괘씸했다. 하지만 이를 알아보는 유치원생은 없었다.

 

 이후 다른 친구들의 연극이 몇 차례 있고 수업이 끝났다. 그는 이후 연극이 어떤 내용인지 들리지 않았다. 멍한 상태였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갈수록 그는 왠지 배가 아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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