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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

수많은 이성과 잠자리를 해야지 (공적 사적 영역, 정체성, 인격)

 그는 한스 페터 뒤르 저자의 '음란과 폭력', '은밀한 몸', '에로틱한 가슴' 3부작을 읽는다. 저자는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 인간에게 내재되어있는 성, 수치심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고찰한다. 문명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인간은 여전히 신체를 갖고 있으며 성적 본능을 갖고 있다. 한스 페터 뒤르의 책은 그로 하여금, 어렸을 적 그가 품었던 생각에 대해서 되돌아보게끔 한다.

 

 군대를 전역한 직후, 그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었다. 억눌린 생활에서 막 해방된 차에,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고 알려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 띄는 것은 이성이었다. 모르는 이성을 볼 때마다, 그의 가슴은 알 수 없는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 차곤 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친구들에게 말했다. 수많은 이성과 잠자리를 해봐야하지 않겠느냐고. 그런 경험을 해봐야, 나중에 진정한 연인이 생겼을 때 만족시켜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태어나서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봐야하지 않겠느냐. 그가 이런 말을 하면,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 상당수가 동조했다. 수많은 이성과 잠자리를 해봐야하지 않겠나. 심지어, 어렸을 적에 건강한 신체로 화류계 일을 해보는 것도 어찌보면 나름의 경험이 되지는 않을까. 철없고도 위험한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이러한 생각을 직접 실천에 옮기진 않았다. 그저 입으로 떠들고 망상을 할 뿐이었다. 그는 본래 꾸미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꾸미는 데 소질도 없다. 이성들은, 잘 꾸미는 이를 좋아한다. 그가 주변을 돌아보면, 이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일종의 타입과 패턴이 있었다. 이해가 될 듯 되지 않는, 따라하고 싶지도 따라할 수도 없는 그런 타입과 패턴이 종종 보였다. 그로서는 왜 저런 겉만 번지르르한 이들이 인기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저들이 아니라, 속이 알찬 자신을 봐달라. 하지만 그는 실제로 속이 알찬 사람인가? 또한 진정한 내면을 봐달라고 호소하는 그 자신조차도, 정작 이성을 바라볼 때는 속이 아닌 겉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성욕이 누그러져서인지 그도 조금은 정신을 차렸다. 수많은 이성과 잠자리를 해보겠다는 자신의 옛 이상을, 어렸을 때의 치기 어린 생각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의 속에는 아직도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기회가 되지 않아서 이루지 못했을 뿐, 기회가 온다면 어렸을 적 이루지 못한 소망을 다시 이뤄보고 싶다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즉, 그는 여전히 수많은 이성과의 잠자리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런 경험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부러워하곤 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들이, 한스 페터 뒤르의 책을 읽으며 한순간에 무너지게 된다.

 

 그에게 일종의 깨달음을 얻게 해준 구절은 이렇다.

 

 - 우리 삶의 특정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통제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에 속한다. 이런 영역을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접근할 수 있게 허용한다면, 단순히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주를 확장시키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런 영역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인격의 본질까지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사적인 영역 중 하나가 인간의 성이다.

 

 

 그는 책에서 마주친 이 부분을 계속해서 곱씹는다. 그는 오랜 취업준비 생활로 인해 번식 욕구에서 한 발짝 멀어졌으며, 그래서인지 성에 대해서 조금은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듯하다. 책의 이 부분에 대한 그의 해석은 이렇다.

 

 사람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는 여러 영역이 있다. 가장 포괄적인 범주 중 하나로, 어떤 사람의 성격은 다른 사람에게 얼마만큼 자신을 공개하는가의 범주에 의해 결정된다. 그는 자신의 초, 중, 고교 시절을 떠올린다. 같은 반에 속했던 친구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집안 가정사는 물론 개인적인 것을 모조리 다 말해버리는 친구도 있었고, 듣기만 할 뿐 본인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 친구도 있었다. 이야기를 많이 하는 부류의 친구는, 때로는 활발하다고, 때로는 입이 싸다고 여겨졌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 부류의 친구는, 때로는 과묵하다고, 때로는 속을 알 수 없고 음침하다고 여겨지곤 했다.

 

 다시말해, '타인에게 자신의 정보를 얼마나 공개할 것인가'는 그 사람의 성격(정체성)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다. 조금 더 나아가서, '타인에게 자신의 신체를 얼마나 허락할 것인가'도 분명 그 사람의 성격(정체성)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다. 사랑하는 연인에게만 신체를 허락하는 사람과, 어느 누구에게나 신체를 허락하는 사람은 신체 접근의 영역에서만 차이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로 인해 정체성 자체가 변화하는가.

 

 어렸을 적 그가 목표했던, 수많은 이성과의 잠자리를 이루려 했다면 어땠을까. 그가 다른 이성들의 신체에 접근할 수 있었던 만큼, 그도 수많은 이성들에게 자신의 신체를 공개해야 했을 터다. 잠자리, 즉 섹스란 일방향이 아닌 양방향 소통에 가까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그는, 다른 요소들을 간과한 상태로 그저 잠자리에만 집착했다. 많은 잠자리 경험이라는 능력을 획득하겠다는 생각이다. 즉, 그는 잠자리를 그저 'Skill(기술)'의 범주로만 생각했다. 많은 잠자리를 경험하고 나면, 그 자신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잠자리 기술이 탁월해진 자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수많은 이성과 잠자리를 가진 이후의 그가 과연 이전의 자신과 똑같은 '나'인가다. 학창 시절 친구들을 떠올려봐도, 스스로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공개하는지의 여부만으로도 성격이 갈렸다. 그런데, 수많은 이성에게 신체를 허락한 사람은 이전과 똑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 그가 생각한 것처럼, 그저 'Skill'만 획득한, 수많은 잠자리 이전과 똑같은 인격(정체성)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수많은 이성과 잠자리를 하려면, 자신의 신체라는 영역의 접근성을 대폭 넓혀야 한다. 잠자리만이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아무 곳에서 아무에게나 훌렁훌렁 옷을 벗어제끼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경험과 과정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인격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가 아니면 변화할 것인가.

 

 그렇게 수많은 이성과 잠자리를 하고 난 이후의 그는 어떻게 변할까. 그는 책의 구절을 곱씹을수록, 그리고 만일의 상황을 가정할수록 확신이 없다. 수많은 이성과 잠자리를 하여, 결국 목적을 달성했다면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과 똑같은데, 그저 '잠자리 Skill'만 획득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 과정에서 그도 변해버렸을까.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신체를 무분별하게 허락하는 동안 조금씩 변화하여,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정체성)의 소유자가 돼버리진 않았을까.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마다, "야 여자 없냐 여자?" 이렇게 말하는 인간이 되어버리진 않았을까.

 

 

 그가 보았던, 이성에게 인기 있는 이들, 이성과 잠자리를 많이 해본 이들은 일정한 타입과 패턴이 있다. 그가 부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멸시하기도 했던 패턴이다. 그는 자신이, 이런 패턴과 타입의 장점만 취하고 단점은 버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 것이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그의 어린 시절 목적을 이루려 했다가, 그도 저들과 똑같은 패턴을 갖게 되지는 않았을까.

 

 물론, 잠자리를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기술과 경험만 얻은 상태로 자신은 해당 경험 이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격을 생각해보았을 때, 수많은 경험 속에서 자신의 현재 가치관과 인격을 유지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다.

 

 생각이 이렇게 도달하자, 그는 어린 시절의 어리석은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외부 상황이 조금 다르게 돌아갔다면, 만일 그에게 화류계에서 일하라는 제안이라도 있었다면(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는 생각없이 덥석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면, 그러한 경험을 한 그는 지금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한스 페터 뒤르의 책을 읽은 덕에, 그는 어렸을 적 품었던 어리석은 생각을 버릴 수 있게 된다. 또한 동시에, 가끔 주변에서 보이는, '수많은 이성과의 잠자리를 자랑하는 이들'을 더이상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저들이 자랑하는 경험을 얻고 난 이후의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다. 저들과 똑같은 경험을 함으로 인해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보다, 그는 현재까지 자신이 겪어온 경험과 자신의 가치관을 신뢰한다. 그는 의외로, 스스로에 대한 애정이 높은 사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