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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회사

61 - 성장 명찰 도입 (고인물 전시)

  사업부장 : 얼굴아~

  그 : 네! (후닥닥 달려간다)

  사업부장 : 이거를 이제 앞으로 하려고 하거든. 홍보팀에 업체 연락처랑 있으니까. 얼굴이 너가 앞으로 맡아서 진행하도록해.

  그 : 알겠습니다!

 

 사업부장은 그에게 무언가를 건넨다. 명함 정도 크기의 얇은 직사각형 물체. 건네받는 순간, 차가운 온도와 묵직함이 느껴진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얇은 판이다.

 

  사업부장 : 회사를 오래 근속한 인원들한테, 사업부 차원에서 성장 명찰을 해줄 거야. 오른쪽에는 회사 마크랑 이름, 맡은 업무, 입사일을 나오게끔 해서 하고. 왼쪽에는 이제 본인들이 넣고 싶은 이미지나 글귀 같은 거 받아서 업체에 요청하도록 해. 1000일은 블랙, 2000일은 실버, 3000일은 골드 색상으로.

  그 :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사업부장에게 건네받은 금속판을 살펴본다. 해당 업체에서 보내온 샘플로 보인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얇은 금속판. 너무 반짝여서 잘 안 보였는데, 각도를 틀어서 보니 얼굴과 숫자가 보인다. 낯익은 얼굴인 듯하여 자세히 보니, 아이돌 얼굴이다. 아이돌의 프로필 사진 같은 것과 전화번호 예시(010-1234-5678)가 금속판에 인쇄되어 있다.

 

 그는 예전 대학교 시절, 레이저 컷팅기를 사용해 본 경험이 있다. 아마 그런 기계를 사용한 결과물이지 않을까. IT사업부에 입사한 지 1000, 2000, 3000일차가 되는 직원들은 앞으로 이 금속판을 수여받게 되는 것이다. 사업부장이 명명한 대로, 이 금속판은 '성장 명찰'로 불리게 된다.

 

 

 업체에 주문하고 물품을 전달받는 것임에도, 신경써야할 일이 꽤 많다.

  1. 위층 관리팀 대응 관련

       ㄴ재무팀 : 계산서 발행과 대금 지급 관련하여 협조 요청

       ㄴ총무팀 : 왜 이런 명찰을 진행하는지 사유 설명 및 매월 거래 명세서 증빙 제출

 

  2. 업체 대응 관련

       ㄴ계산서 발행 요청 (재무팀이 원하는 형태로 진행되도록)

       ㄴ거래명세서 요청 (총무팀이 원하는 증빙 형태로 진행되도록)

       ㄴ제작 희망하는 디자인 파일 전달 (파워포인트로는 불가하여 일러스트 형식으로 전환 필요)

           ㄴ홍보팀의 '디자이너'에게 요청

 

  3. 사업부 내부 대응 관련

       ㄴ1000일, 2000일, 3000일이 곧 도래하는 직원들에게 안내

       ㄴ원하는 디자인을 전달해 달라고 요청

       ㄴ금속판 위에 새기는 것이기 때문에, 복잡한 색상이나 음영 표현 불가.

           (제작 불가한 디자인으로 취합되었을 경우, 안내하고 디자인 재요청)

 

 홍보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굳이 그가 끼는 것보다는 홍보팀에서 진행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다. 업체 조사부터 이미 모두 홍보팀에서 진행했고, 사업부에 한 명 있는 계약직 디자이너도 홍보팀 소속이다. 그가 직접적으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안내하고, 디자인 요청하고, 디자인 취합해서 디자이너에게 전달하고, 이 디자인은 안 된다고 하면 다시 요청하고, 업체에 증빙 요청하고, 돈 나갔는지 확인하고.

 

 참으로 안타깝지만, 결국 그는 중간에서 커뮤니케이션만 담당하는 것뿐이다. 어떻게 이야기가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업부장이 그에게 일을 맡긴 시점부터 홍보팀은 그에게 인수인계 자료를 넘기고 철수한다. 하지만 이 당시의 그는, 그런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로 시야가 넓지 않다. 감사한 마음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사업부 인사 담당자, 총무 담당자가 아닌가. 금속 성장 명찰 업무를 진행하며, 이 큰 사업부의 조직문화를 개선하고 소속 직원들의 애사심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는 것 아닐까?

 

 

 성장 명찰 업무를 진행하기가 무섭게, 온갖 문의사항이 빗발치기 시작한다. 그가 답변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 디자인 어떤 걸로 해야해요?

  - 저는 색깔 많이 들어가는 게 좋은데, 이거는 안 되나요?

  - 바쁜데, 디자인 언제까지 드려야 하나요?

  - 다른 사람들은 주로 어떤 디자인으로 하나요?

  - 이렇게 만들면 실물로 봤을 때 예쁘게 잘 나오나요?

  - 이거 파티션에 붙이고 싶은데, 자석 같은 건 없나요?

  - 자리에 세워두고 싶은데, 거치대는 없나요?

  - 디자인이요? 그냥 아무거나 해주세요.

  - 저 지금 2000일로 전달받았는데, 1000일 것까지 같이 2개로 하면 안 되나요?

  - 저는 다른 사업부에서 옮겨와서 원래 2000일차인데, 날짜 카운팅을 언제부터 하나요?

  - 이거를 원래는 안 했는데, 갑자기 진행하는 이유가 뭔가요? (관리팀)

  - 다른 사업부는 안 하는데, IT만 하는 이유가 뭔가요? (관리팀)

 

 자꾸만 문의를 받아 답답한 그, 그는 업체 홈페이지를 검색하여 접속한다. 들어가 보니, 이 금속판은 원래 자동차 앞유리에 부착하기 위한 용도다. 차량 주인의 연락처를 남겨놓기 위한 용도의  금속판. 그가 속한 IT사업부는 창의적으로, 이 금속판을 커스터마이징해 '성장 명찰'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그는 생각한다. 제작 업체 측에서는, 그의 회사가 진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구나.

 

 

 온갖 문의에 대응하며 정신없이 바쁜 그, 그는 이 자랑스러운 업무를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이야기했다. 지인 중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 뭐? 1000일은 블랙, 2000일은 실버, 3000일은 골드로 해서 나눠주고 자리에 붙여놓는다고? 무슨 고인물 전시해?

 

 고인물 전시라는 말을 들으며, 그도 속으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