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국인을 기피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을 만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워킹홀리데이를 시작했을 당시에는 한국인들에게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먼 타국에서 같은 한국인들끼리 무언가 챙겨주지 않을까, 인상 좋고 예의바른 자신에게 일자리를 알선해 주지 않을까 하는 식의 기대가 그것이다.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의 워킹 생활 초반에, 어쩌다가 만나 말이 트인 한국인이 더러 있었다. 대화 내용은 단순하다. 이 때의 그는 주로 워킹 선배인 상대방의 말을 듣는 축에 속한다. 그는 속으로는 집중하지 않더라도, 겉으로는 집중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 잊지 않고 반드시, 자신이 구직활동 중임을 은근히 내비친다. 그가 구직 활동 중임을 밝히면, 이를 들은 한국인들의 반응은 거의 한결같다.
"지금 일 구하고 있다고? 내가 아는 사람이 어디어디서 일하는데, 얘기해줄게."가 기본 뼈대이며, 경우에 따라 다양한 사족이 붙는다.
여기 원래는 들어가기 힘든데, 내가 부탁하면 면접까지는 갈 수 있어. 근데 면접은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해. 말해놓을 테니까 면접 준비하고 있어. 면접 꽤 어려워. 이상한 초밥집에서 최저도 못 받고 일하고 있다고? 빨리 그만둬. 최저시급도 못 받고 그런 일을 왜 해? 내가 얘기해둘게. 여기가 훨씬 나아..... 등이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너무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찬 말투에 그는 흔들린다. 하지만 왠지 미심쩍어 톰의 초밥집을 그만두지 않았고, 이는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 있으니, 얘기해주겠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일자리를 구한다는 자신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는 한국인을 10명 넘게 만났다. 처음에는 그 말이 너무나도 반갑고, 기쁘고, 설렜다. 먼 타국에서도 의지할 사람은 같은 한국인 뿐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연락이 오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얘기해봤는데 잘 안됬다던지, 어떻게 되었는지 진행상태만 알려주어도 그는 감사하다고 대답할 참이었다. 하지만 진행상태는커녕, 아예 연락 자체가 없다. 애초에 남인 듯, 모르는 사람인 듯하다. 10번에 가깝게 반복되고 나서야, 그는 깨닫는다. 그들은 단순히 배설하듯, 자랑을 했을 뿐이다. 이것이 그가 호주에서 처음 깨달은 한국인의 정이자 오지랖이다.
그는 영악한 면이 있어서, 이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일부러 한국인들을 시험한다. 그가 일을 구하고 있다고 말하면, 이를 들은 한국인은 십중팔구 같은 말을 한다. 본인만 믿으라는, 연락 기다리라는 말이다. 그는 이제 이런 발언 자체를, 그와는 다시는 연락할 생각이 없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받아들인 뜻은 언제나 옳다.
그는 은근히 순진한 면이 있어서, 사람을 잘 믿었다. 자신만만하게 일자리를 구해주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로 능력 있고 듬직한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같은 일이 10번 넘게 반복되자, 배움이 느린 그조차도 확실히 깨닫는다. 일자리를 구해주겠다는 말은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 모든 것은 결국 그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낯선 타국에서 한국인끼리 만났다고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아가며 일자리를 찾아줄 동기는 없다. 일단, 그럴 능력이 없다. 만일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자리를 구해주는 것에 대한 대가나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이 결론이 그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된 순간부터, 그는 한국인들 앞에서 자신이 구직활동 중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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