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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79 - 리셋 증후군

 리셋 증후군 : 게임이나 기계의 리셋 버튼을 눌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듯, 인생이나 인간관계 등도 리셋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인식하는 증상을 통칭



 워홀러를 비롯해, 외국 생활이나 새로운 환경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외국에서는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한다,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등의 말이다.


 이러한 말을 하는 심리 기저에는, 리셋 증후군이 어느 정도 작용하는 듯하다. 지금까지의 모습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었으므로,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리셋 증후군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낯선 곳,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상황은 묘한 설렘과 흥분을 자아낸다. 새로운 장소로 여행을 떠나면,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삼갔을 행동을 하기도 한다.


 리셋 증후군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정도가 과도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양날의 검인데, 자신을 향한 쪽의 칼날이 더 날카로운 검으로 보면 된다. 스스로를 리셋함으로써, 자유로움과 쾌감 및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용기를 갖게 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 리셋하면 될 테니, 지켜야 할 도리와 책임을 져버리고 자제력을 상실할 수 있다.



 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 종종 보이는, 워홀러들의 이른바 '막장' 사례들은 리셋 증후군과 관계가 깊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호주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한다. 1~2년 뒤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차피 평생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이런 식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마땅히 져야 할 책임감과 기존의 도덕적 잣대는 점점 흐릿해지다가 결국 없어져버린다.


 1. 도덕, 책임 회피 주로 일 관계나 채무 관계에서 나타난다. 면접을 보기로 했는데 나오지 않거나(노쇼), 일을 하다가 '잠수'를 타거나, 개인간 금전 거래에서의 약속을 무시하는 경우다. 반복되는 노쇼와 잠수로 인해, 한인 청소잡 고용주들은 일하는 사람에게 보증금을 내게끔 하는 특단의 조치까지 취한다. 이 유형의 워홀러들은 늦잠 자고 시계를 본 뒤, 고용주의 카카오톡과 전화를 차단해버린다. 고용주로서는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지경에 이르며, 이런 워홀러들을 반복적으로 만날수록 고용주는 악덕 고용주로 변한다.


 금전 거래에서 특히 문제가 극심하다.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한국인의 페이스북을 들어가보면, 친구 추가도 되어 있지 않은 누군가가 욕을 하며 돈 내놓으라는 글을 써놓은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개개인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금전 거래에서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친해진 워홀러들끼리는 사적으로 돈을 빌리고 갚는다. 비자 만료나 귀국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경우, 평생 마주치지 않을 작정으로 돈을 떼먹고 도망가버리는 경우가 있다. 당연히 카카오톡은 차단하고 '잠수'를 탄다. 상대방은 분노에 치를 떨며, 페이스북이나 SNS를 테러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


 2. 문란한 성생활 20대 피 끓는 신체, 낯선 타국에서 느끼는 외로움,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순간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펼쳐진다. 한 번뿐인 인생, 1~2년뿐인 호주 생활,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 완벽하다. 외로운 워홀러들은 널리고 널렸다. '수많은 이성을 만나고 성관계를 가지는 것도, 호주 워킹홀리데이만이 가진 매력이자 좋은 경험 아닌가' 라며 무분별한 성욕 분출을 합리화한다. 이성이 성욕에 압도되어 마비된 상태다.


 어떤 이는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정글'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으니, 야생의 정글처럼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관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같은 쉐어하우스 내의 모든 이성과 성관계를 가지고, 그중 눈이 맞는 경우 아예 방을 구해 나간다. 열정적인 시간을 보내다가, 한쪽의 비자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남은 한쪽은 다시 쉐어하우스로 들어가 새로운 이성을 찾는다. 쉐어하우스 뿐만 아니라, 클럽도 다닌다. 한국에서보다, 호주에서의 원나잇 확률이 더 높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1번과 2번 유형이 혼합되면, 그야말로 '막장' 사례가 벌어진다. 함께 지내던 이성에게 돈을 꾼 뒤,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버린다. 지역을 옮겨 다른 이성을 만나 지내다가, 똑같은 수법으로 돈을 꾸고 귀국해 버리는 식이다. 호주 한인 웹사이트에는 이런 수법에 당한 피해자들의 제보가 올라오곤 한다. 어떤 피해자가 글을 올리자, 그 사람 이름이 OOO 아니냐며 자신도 피해자라고 나서는 글을 그는 읽은 적이 있다.


 주위로부터의 간섭이 없다는 것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잘못된 선택을 해도 조언이나 제지해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호주 워홀러들은 처음 느끼는 무한한 자유에 심취하지만, 그 자유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이를 꼭 명심해야 한다. 본인 스스로 주관을 뚜렷이 하고, 중심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 워홀러가 스스로 중심을 잡지 않고 상황과 주변에 휩쓸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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