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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

29번째 기업 (ㄴ-2그룹, 건자재)

 상반기 시작부터, 대어가 낚인다. 상반기 채용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수많은 기업들이 채용 공고를 올렸다. 그중에는 대기업의 채용 공고도 많다. 그도 당연히 대기업에 이력서를 날린다. 하지만, 계속된 탈락으로 인해 기대감은 낮다. 그는 자신이 번쩍거리는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떡하니 대기업 서류에 합격한다. 29번째 기업이다.

 

 29번째 기업은, 기업 집단의 핵심 기둥 역할을 하는 회사 중 하나다. 기업 집단, 재벌, 그룹에 속한 기업들은 대부분 그룹의 이름을 앞에 붙인다. xx자동차, xx건설, xx식품, xx화학, xx디스플레이 등이다. 29번째 기업은 건자재(건축자재), 자동차 부품, 필름 등의 고기능소재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29번째 기업이 속한 그룹의 역사는 꽤 복잡하다. 요약하여 이야기하자면, 'ㄴ그룹'이다. 그가 이전에 면접을 보았던 'ㄱ그룹'처럼, ㄴ그룹도 한국에서는 굴지의 재벌가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명성은 잘 모르겠으나, 한국 내에서는 다른 재벌가들과 견줄 만하다. 사실인지 이미지 메이킹인지 모르겠으나, ㄴ그룹은 예부터 '사람과 화합'을 중시한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래서인지 취업을 하려는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다.

 

 태초의 ㄴ그룹은, 두 성씨를 가진 두 가문이 동업을 했다. 한쪽 성씨는 사업 확장, 교섭 같은 대외 업무를 주로 맡았다. 다른 한쪽 성씨는 회계, 재무 등 내부 업무를 주로 맡았다고 한다. 공업사부터 시작하여 사명을 영어로 바꾸고,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함께 점점 그룹이 커졌다. 

 

 그룹이 커지자, 동업을 하던 두 가문이 마침내 갈라진다. 

모태 그룹 (대외업무 맡은 성씨) : 전자 / 통신 / 화학(주력 육성)

독립 그룹 (내부업무 맡은 성씨) : 건설 / 유통 / 에너지 등

 

 ㄴ그룹에서 파생된 회사와 그룹이 상당히 많지만, 가장 굵직한 가지는 위의 둘이다. 정통성을 가진 모태 그룹, 동업하던 성씨의 독립 그룹이다. 두 그룹은 성공적으로 성장하여, 독립 그룹도 모태 그룹 못지않은 기업 집단을 일군다.

 

 

 흔히 말하기를, 동업하면서 인간관계가 틀어지는 일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심지어 가족끼리도 동업은 하지 말라는 말이 많다. 그런데 ㄴ그룹은 예외인가 보다. 성씨가 다른 두 가문이, 80년 가까이 동업하면서도 별 다툼이 없었다. 마침내 두 성씨가 결별하여 그룹이 분리될 때도, 가문 간의 불화설 따위는 대두되지 않았다. 미래 상속 문제로 인한 후손들의 다툼을 방지하고자, 두 집안이 자체적으로 지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의 분리라고 한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잡음 없이 깔끔하게 기업이 분리되었고, 모태 그룹과 독립 그룹은 현재에도 사이가 나쁘지 않다.

 

 두 성씨의 분리도 그렇지만, 한 성씨 내에서의 분리도 별 분쟁 없이 깔끔하다. 모태인 ㄴ그룹은,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한다. 흔히 드라마나 사극에서 보듯, 왕이 왕자에게 양위하면 왕의 동생(왕자의 숙부) 등의 친인척이 불만을 품어 권력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특이하게도 ㄴ그룹 가문은, 이러한 류의 권력 다툼이 드물다. 장자가 그룹을 이어받으면, 손윗사람이나 방계 등이 알아서 분리하여 나가는 식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ㄴ그룹이 '사람과 화합'의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가지는 데 큰 영향을 준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29번째 기업에 지원한 시기가 바로 이러한 때다. 

1) ㄴ그룹의 경영권이 장자에게 새롭게 승계된다. 

2) 조카가 경영권을 이어받자, 손윗어른이 물러난다. 

3) 물러나면서 몇몇 계열사를 받아 독립한다. 

 

 ㄴ-2그룹의 탄생이다. 29번째 기업은, 분리해 나온 ㄴ-2그룹의 핵심 계열사다. 그는 29번째 기업 / 사업부문 / 경영기획 직무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그가 제출한 이력서는 이렇다.

 

 

1. 기본사항

지원사항

  1지망) 사업부문 / 경영기획

  2지망) 사업부문 / 경영기획 

  (18번째 기업에서의 최종 면접을 떠올리며, 그는 1지망과 2지망을 동일하게 설정한다)

기본인적사항

병역사항

 

 

2. 상세인적사항

고등학교

대학교

공인어학성적 : OPIC (AL)

자격증 : 군대에서 취득한 작업 관련 자격증

경력사항 X

 

 

3. 자기소개서

 

1) 지원동기 및 비전, 왜 29번째 기업에 지원했느냐

  - 실물 경제에 이바지하는 인재가 되겠다

 

2) 직무역량, 본인이 직무에 적합한 이유와 이를 갖추기 위해 했던 준비

  - 워킹홀리데이

 

3) 경험/개인특성, 도전적인 목표 경험 or 팀워크 경험

  - 대학교 공놀이 동아리

 

 

 대기업 이력서이긴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제출했던 이력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류 합격 메일을 받은 이후, 그는 면접 준비에 돌입한다.

 

 오랜만의 대기업 서류 합격에 그는 들뜬다. ㄱ그룹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다시 대기업 입사의 기회가 주어졌다. 원래라면, 그는 대기업 서류에 합격할 수 없었을 터다. 분리 직후 ㄴ-2그룹이 시작되는 시점에, 리스크를 조금 부담하더라도 여러 인재를 채용하려는 것은 아닐까. 망상의 날개가 펼쳐진다.

 

 이번 채용은, 분리 후 ㄴ-2그룹이 처음으로 실시하는 공채다. 첫 공채이니, 다양한 인재를 선발하기도 하거니와 채용 과정에서도 약간은 허술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허술한 지점을 파고든다면 자신이 합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꿈도 꾸지 않았던 대기업 입사의 기회가 아닐까. 그가 취업준비를 하던 이 시기에, 우연히도 ㄴ-2그룹의 분리와 첫 공채가 맞물렸다. 그는 29번째 기업 서류 합격이, 자신과 ㄴ-2그룹의 운명과도 같은 만남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ㄴ그룹의 분쟁 없는 경영권 승계 과정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장자 승계라는 전통을 고수하는, 그 전통을 바꿀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경직된 구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만일 가장 윗단 오너 일가의 분위기가 그렇다면, 기업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과 화합'을 중시하는 수평적인 기업이었을 수도, 기존 체제의 안정을 위해 변화를 찍어누르고 복종을 강요하는 수직적인 기업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간만의 대기업 서류 합격에 마냥 들떠있다. 상반기 시작부터 대어다.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그는 부푼 가슴을 안고 면접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