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29번째 기업에 매달렸던 이유는 물론 기업과 직무가 마음에 들어서이기도 했지만, 그의 영어 점수 만료가 다가온다는 것도 큰 이유로 작용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직후, 나름 실전 영어에 자신감이 붙은 상태에서 공부해서 취득한 그의 영어 점수는 '토익 940 / 오픽 AL'이다. 그는 무스펙에 가깝기 때문에, 자신의 영어 점수에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취업은 영어 실력만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취업에서 영어는 부가적인 요소일 뿐이다. 영어를 전면에 내세우려면 현지인 수준(Native)으로 구사하기라도 해야 하지만, 고작 워킹홀리데이 1년의 기간으로 영어를 현지인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의 영어 점수는, 한국의 평균적인 취업준비생들 중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점수일 뿐이다. 그 영어 점수라는 것도, 결국 다른 스펙들과 조합이 되어야 한다. 다른 스펙(자격증, 인턴, 직무 경험)이 갖춰진 상태에서 영어까지 잘한다면 참 좋다. 하지만 다른 스펙은 전무하고 영어 점수만 높다면 이는 별 효력이 없다. 기업은 영어 점수만 높은 국내파보다, 차라리 해외파를 선호할 수 있다. 그는 해외영업 신입 면접에서, 해외 생활을 오래 한 주재원 아들들을 많이 봤다.
그의 취업 준비 기간은 계속해서 늘어지고 있다. 토익 940점은 애초에 만료되었다. 그는 토익 시험이라는 것이, 한국의 전형적인 시험용 영어, 즉 '한국식 영어 시험'이라고 깔보았다. 그래서 그는 토익 점수가 만료되었음에도 재응시하지 않았다. 오픽 점수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업들도, 토익 만점자가 실제 회화에서 영어 한 마디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익과 같은 필기보다는, 영어 스피킹 시험을 더 우대하는 추세다.
문제는,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오픽 점수도 만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오픽마저 만료되면, 그의 영어 스펙은 아예 사라지게 된다. 영어 점수가 없으면, 웬만한 기업에는 서류 지원 자체가 불가하다.
바로 이런 상황, 오픽 점수 만료를 코앞에 두고 면접을 진행한 기업이 바로 29번째 기업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오래도 걸린 취업 준비 기간, 영어 점수 만료를 코앞에 두고 마침내 29번째 기업과 운명적으로 만났구나. 영어 시험을 재응시하기는 싫었는데, 마침 사명을 바꾸고 첫 공채를 실시하는 29번째 기업에 서류와 1차 면접을 합격했다. 상황과 타이밍이 기가 막히지 않나. 그는 29번째 기업에 최종 탈락했다.
29번째 기업 탈락 직후, 그는 오픽 시험에 다시 접수한다. 영어 시험을 다시 보고 싶지 않지만, 서류 지원 자격에 영어 점수가 필수이니 어쩔 수 없다. 그가 오픽 시험을 재응시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7만 원이라는 응시료도 응시료지만, 자신의 영어 실력이 이전보다 줄어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도 있었던 듯하다. 당연하지만, 호주에서 막 돌아왔던 2년 전보다, 2년 동안 독서실에 틀어박혀 취업준비만 한 그의 현재 영어 실력은 아무리 너그럽게 보더라도 더 향상되지는 않았을 터다.
그는 2년 전 오픽 시험을 준비했을 때의 노트를 펼치고 다시 영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반드시 AL을 받으리라. 2년 동안 취업 준비만 하며 이룬 것이 없다. 그나마 조금 나은 실력을 가졌던 영어마저 그 2년 동안 퇴보했다면,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는 오픽 전문가라는 유튜버의 영상을 보며, 오픽 시험을 준비한다.
오픽 시험 당일, 그는 시험을 치른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는 발화량을 늘려 자신의 유창함을 뽐내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런데 이날, 그는 시간 관리에 실패한다. 오픽 시험은 대략 15~18문제로 이루어지는데,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진다. 그는 앞 문제들에서 말을 너무 많이 했는지, 뒤의 2문제를 남겨둔 상태에서 시간은 1분이 채 남지 않았다. 그는 급하게 마무리하며, '시간이 없다,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 다음에 보자' 라는 식으로 역할극을 하며 시험을 마무리한다. 원래 오픽 시험이라는 것 자체가, Eva라는 AI 인물과 대화하는 척 연기하는 시험이다. 앞의 문제들에서 나름 이야기를 잘했으니, 시험관들도 이 정도쯤은 넘어가 주겠지 생각하는 그다.
1주일 뒤, 오픽 시험 결과가 발표된다. 그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결과를 확인한다. 결과는
IH (Intermediate High)
결국 그는 AL을 받는 데 실패한다. 29번째 기업 최종 탈락보다 영어 성적이 떨어진 것에 더 충격이 심한 그다.
AL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이 크다. 그는 어떻게든 변명을 만들고자 한다. 기나긴 취업 준비 기간을 거치면서, 그는 조금씩 우울한 기운을 풍기기 시작했다. 그의 기본 상태가 우울한 상태이니, 그가 하는 말과 사용하는 단어도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감정적인 말투나 표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변명으로 고안해낸 것이긴 하나, 이는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그는 감정이 배제된 매체를 선호한다. 유튜브 영상도 그렇고, 책도 주로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의 비문학을 선호한다. 문학 도서의 매력을 뒤늦게 알아가고 있긴 하나, 그의 독서 뿌리는 비문학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과 논리에 기반한 스토리나 의견 전개가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 말투, 그런 사고방식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오픽(OPIC)이라는 영어 시험은, 어찌 보면 '외국인 흉내내기'다. 토익 스피킹은 문법을 중시하기 때문에, 발음이 원어민과 다소 다르더라도 정답(Script)을 완벽하게 외우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픽은 다르다. 오픽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기준은, 공식적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다. 오픽 시험관들은 현지인스러운 발음, 현지인스러운 표현, 현지인스러운 느낌을 풍길수록 점수를 높게 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픽 시험을 준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지인스럽게 보이는 표현들을 일부러 외운다.
Um, Yeah, You know, well, Oh my god, you know what I mean 등등
그는, 자신은 일반적인 한국인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영어는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러, 억지로 외국인 흉내를 내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라 생각한 것이다. 미국식이든 영국식이든 북유럽식이든 동남아식이든 인도식이든 다른 어떤 나라의 엑센트가 묻어나든 상관없다. 그는 자신에게 맞다고 생각되는 영어 말하기 방식을 고수했으며, 이야기를 할 때도 감정을 되도록 배제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앞서 말했듯, 오픽은 '영어 말하기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그리고 오픽 시험관들이 원하는 '말하기 능력'에는, 얼마나 외국인스러운가에 더해 얼마나 감정적인 표현을 잘 쓰느냐도 포함되는 듯하다. 그가 추구하는 말하기 방식은, 오픽 시험관이 원하는 방향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현지인들은, 이러한 차이가 무관할 정도로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그의 영어는 현지인 수준이 아니다.
AL을 받지 못하고 IH를 받은 상황, 그는 온 힘을 다해 변명을 만들어낸다. 그의 영어 실력은 퇴보하지 않았다. 시험관들이 원하는 것처럼, 외국인스럽게 흉내 내고 일부러 감정적인 표현을 많이 쓰면 자신도 AL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점수만 IH일 뿐, 그의 영어 실력은 AL을 받았던 2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신의 영어 실력은 쇠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렇게 어거지로 합리화를 하고 나니, 허탈하면서도 약간은 진정이 된다. 별 도리가 없다. AL을 받기 위해 7만 원에 가까운 돈을 내고 오픽 시험을 다시 응시할 것인가. 그는, 우선은 IH 성적으로 서류를 지원하기로 한다.
문득, 2년 전 졸업 선배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던 때가 떠오른다.
선배 : 지금부터 취업 준비해도 좋은 데 갈 수 있어요. 영어 점수도 좋잖아요.
그 : 이 점수가 만료되기 전에 붙어야 할 텐데요.
선배 : 에이, 그 전에는 붙죠.
그로부터 벌써 2년이 지났다. 그는 영어 성적이 만료될 때까지 2년이라는 기간 내에 취업하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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