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을유문화사 2020 출판 / 408p
유현준 저자는 건축가이며, 알쓸신잡에 출연했었고 여러 책을 쓴 작가다. LH사태를 어느 정도 예견했다는 평을 받으며, 최근 유튜브에서 핫한 인물이다. 그의 영상들을 보면, 그가 일관되게 설명하는 건축관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의 주된 내용은 건축이 아니다. '새로운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건축과 무관하지도 않다. 천장고가 높은 공간이 창의성을 끌어올린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건축은 새로운 생각과 연관이 깊다. 공간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만, 만들어진 공간은 다시 인간에게 영향을 준다. 인간과 건축(공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저자는 새로운 생각이 '서로 다른 생각들을 화합시킬 때' 탄생한다고 말한다. 현대까지 인간에게 주어진 새로운 생각의 주된 재료는 '동양의 생각'과 '서양의 생각'이었다.
동양적 사고방식과 서양적 사고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동양은 더 예의바르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한다. 서양은 개인주의적이고,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대략 맞는 분류다. 그런데 왜 그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저자는 이 차이의 근본 원인을 강수량의 차이로 보았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총, 균, 쇠'와 상당히 유사한 접근인데, 책을 읽을수록 납득이 가는 접근이다.
강수량의 차이는, 동서양의 농사와 건축에서 차이를 발생시켰고, 이 차이로 인해 동서양의 사고방식도 달라졌다.
첫 번째, 농작물이 다르다. 동양은 강수량 1000mm 이상의 기후이기 때문에, 벼농사에 적합하다. 반대로 서양은 강수량이 1000mm 이하이기 때문에, 밀 농사가 적합하다. 벼농사는 많은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물을 가둘 토목 공사가 필요하며 시기를 맞춰야 하는 농사다. 즉, 토목 공사를 할 때나 모내기를 할 때 집단으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벼농사 지역의 시골 풍경은 집들이 오손도손 모여 있다.
밀 농사는 비가 적게 내리기 때문에 토목 공사가 필요 없고, 파종도 집단으로 하지 않고 혼자서 한다. 집단적으로 일을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에, 밀농사 지역의 시골 풍경은 집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고 한적하다.
두 번째, 강수량의 차이는 토양의 차이를 야기했고, 이는 건축으로 이어진다.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는 땅이 물러지기 때문에 벽을 세울 수 없다. 그래서 기둥 중심의 건축이 발달했다. 나무 기둥이 물에 닿으면 썩으니 주춧돌을 써서 땅으로부터 띄우고, 지붕 처마에 각도를 주어 비에 맞지 않게끔 했다.
비가 적게 내리는 지역에서는 땅이 물러지지 않으니, 단단한 땅 위에 벽을 세울 수 있다. 그래서 벽 중심의 건축이 발달했다.
기둥 중심 건축은 기둥 위에 지붕을 씌우는 건축이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한옥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처마'는 외부와 내부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 공간이다. 동양의 기둥 중심 건축은 이렇게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하고 열려있다. 이는 동양의 중용 사상과도 일치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것, 선은 중간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벽 중심 건축은 벽이 건물을 지탱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력벽'에 구멍을 함부로 뚫을 수가 없다. 구멍을 뚫을 수 없으니 창문이 조그맣고, 벽 내부와 외부는 구분된다. 이는 서양의 사상과도 일치한다. 서양 학자들은 수많은 현상들을 설명할 절대적 진리, 수학적 원리를 연구했고 신봉한다. 또한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다.
내부와 외부 공간의 경계가 명확한 건축, 명확하지 않은 건축. 두 가지 건축으로 지어진 공간은, 당연히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여기에 각각의 농사짓는 법에 따른 생활 양식까지 가세했다. 강수량의 차이로 인해, 동양은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고, 서양은 절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 차이는 동서양의 언어, 오락, 사상 등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생각(가치관)이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생각이 탄생한다. 저자는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루이스 칸, 안도 다다오의 건축을 예로 들며 설명한다. 섞는 방법에 차이는 있었지만, 네 명의 건축가는 모두 동양과 서양의 생각을 결합하여 건축에 반영했다. 미스와 코르뷔지에의 건축은 한옥이나 일본 전통 건축과 흡사한 면이 많으며, 안도 다다오는 건물 자체는 서양적이지만 배치는 동양적이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동양과 서양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생각의 차이가 옅어지게 되었다. 즉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낼 재료가 부족해졌다. 사람들은 새로운 영감을 찾고자 여러 시도를 한다. 다른 학문, 또는 과거의 것들과 결합하고자 시도했다. 루이스 칸은 과거의 문화 유전자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생각(건축 양식)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실패 사례도 있다. 철학과 건축을 결합하고자 했던 해체주의는, 관념이 실재를 이끌게 되면서 건물이 산으로 갔다. 복잡한 철학 이론을 나타내고자 복잡하게 설계한 건물에서, 그 복잡한 구조 때문에 비가 새거나 주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지리적 차이에 기인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건축계의 새로운 생각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도시들이 비슷비슷하다. 철근 콘크리트와 엘리베이터에 기반한 고층 마천루 빌딩만이 서 있을 뿐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태가 기술에만 의존하는 창조로 인한 결과라고 말한다. 단순히 기술에 의존하는 창조가 아니라, 다른 생각과 결합하여 새로운 생각에 기반한 창조를 해야 미스 / 코르뷔지에 / 안도다다오 / 루이스칸과 같은 새로운 생각(건축 양식)이 가능할 것이라는 말이다.
디지털 시대는 기술에 인간이 압도될 가능성이 크다. 압도된다면 디지털 기술을 적절히 활용한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에 의존하는 새로운 생각만이 나올 뿐이다. 디지털 기술에 의존하는 새로운 생각은, 오늘날 도시 모습처럼 획일적일 것이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다가올 디지털 시대에는, 기술에 압도되어 의존하지 않고, 디지털 기술을 도구로써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새로운 생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역량이 필요할 것이라 조언한다.
공간이 만든 공간, '지구라는 공간'이 만든 '인간이 건축한 공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 공간은 다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며, 인간이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건축가의 시점에서 본 역사, 건축가의 시점에서 본 새로운 생각의 형성을 볼 수 있는 책이다.
여는 글 : 기후, 문화, 변종
1장. 왜 건축물의 빈 공간을 보아야 하는가
공간, 빛, 건축, 공간 지각
2장. 문명을 탄생시킨 기후 변화
빙하기의 끝이 낳은 농업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왜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의 문명이 발생했을까
첫 도시가 만들어지는 데 왜 6000년이나 걸렸을까
같은 시대, 다른 지역에서 태어난 거인들
왜 아테네보다 시안이 더 멀까
3장. 농업이 만든 두 개의 세계
벼농사냐 밀 농사냐
기차, 버스, 철길 중 둘을 묶는다면
강수량이 결정한 건축 공간의 특징
동양은 왜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단청의 색깔이 보여주는 것
서양의 절대적 사고방식
문과생 소크라테스와 이과생 플라톤
철학적 이성과 예수의 공통점
동양의 상대적 사고방식
비움의 가치
4장. 두 개의 다른 문화 유전자
알파벳 vs 한자
체스 vs 바둑
SPACE vs 空間
서양의 기하학적 빈 공간
서양 건축 속 빈 공간의 수학적 진화
양식의 진화가 없는 동양 건축
강수량이 낳은 두 자녀
같은 생각 다른 표현 : 그림과 건축
개미 같은 동양, 벌 같은 서양
남북으로 흐르는 나일강 vs 동서로 흐르는 황하
불교 사찰 '불국사'에 숨은 기하학과 도교 사상
5장. 도자기는 어떻게 서양의 문화를 바꾸었는가
삼각돛이 만든 공간적 혁명
유럽을 바꾼 도자기
번역서의 수입
조경에서 시작된 서양 공간의 변화
3인칭 시점에서 1인칭 시점으로
직선에서 곡선으로
콜더의 모빌 속에 숨겨진 동양적 가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동양
6장. 동양의 공간을 닮아가는 서양의 공간
동양을 닮아 가는 서양의 공간
미스 반 데어 로에와 동양
미스 반 데어 로에 제1기. 벽돌 시골집, 1924년 : 절반의 성공
미스 반 데어 로에 제2기.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1929년 : 기둥으로 만든 처마
미스 반 데어 로에 제3기. 허블 하우스, 1935년 : 짬짜면 같은 주택
미스 반 데어 로에 제4기. 판스워스 하우스, 1946년 : 철과 유리로 만든 한옥
르 코르뷔지에 근대 건축의 5원칙과 동양 건축의 공통점
르 코르뷔지에 제1기. 빌라 바크레송, 1922년 : 서양 전통의 계승
르 코르뷔지에 제2기. 비라 사보아, 1929년 : 기하학의 잔재
르 코르뷔지에 제3기. 밀 오너스 빌딩, 1954년 : 자유곡선 평면의 등장
르 코르뷔지에 제4기. 카펜터 센터, 1961년 : 사각형을 깨뜨리다
두 거장이 새로운 생각을 만든 방식 : 기술 X 다른 문화
7장. 공간의 이종 교배 2세대
기하학 X 도가 사상 X 유대 민족 문화 = 루이스 칸
전통의 재해석
지혜의 왕 솔로몬의 그림자
루이스 칸 안에 노자 있다
건축계의 드래곤볼 : 안도 다다오
서양의 기하학과 동양의 관계성의 유합
물의 교회 : 시간으로 공간을 만드는 법
바람의 교회 : 관계 조절 장치
신체를 측량기로 만드는 건축
서양 건물의 동양적 배치
8장. 학문 간 이종 교배의 시대
지리적 이종 교배의 종말
다른 분야와의 이종 교배
컴퓨터와의 이종 교배
자동차와 IT의 도움으로 실현된 건축물
컴퓨터의 상상력
서로 닮아 가는 패션과 건축 : 같은 언어의 세상
인공지능과 건축
9장. 가상 신대륙의 시대
신대륙을 만들다
가상공간 부동산 회사, 삼성 전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융합하는 시대
현대자동차와 도요타가 꿈꾸는 다른 미래
을지로 속 런던 킹크로스 9와 4분의 3 플랫폼
두 번째 지구 온난화
코로나19가 바꾸는 권력 구조
닫는 글 :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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