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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도서관 애용자

 그는 2주~3주(기본 대출기간 2주, 연장 1주일 가능)에 한 번씩 공공도서관에 출몰한다. 그가 출몰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빌렸던 책들의 대출 기간이 만료되어 반납 / 새로운 책을 대출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전부터 할 일이 없을 때 괜히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곤 했다. 멀뚱멀뚱 시간을 보내느니, 책이라도 보는 것이 그나마 나은 것 같았다. 그렇게 도서관을 가던 시간이 쌓이고 쌓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도서관을 오랫동안 다녔는데, 아직까지 제대로 읽은 책이 하나도 없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도서관에서 보냈던 시간이 그냥 멀뚱멀뚱 보낸 시간과 다름없다고 느껴졌다. 이대로 도서관을 다시는 가지 않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건 내키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찾아서 다시 시작하느니, 하던 것을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시작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는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그는 도서관을 다니면서도, 이미 수많은 시간을 의미 없이 허비했다. 그러한 시간들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제부터 '의미 있는' 독서를 해야 한다. 그는 책장들을 돌아다니면서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가장 눈에 띄는 책들은 아무래도 자기계발서적과 같은 제목이 자극적인 책들이다. '당장 무엇을 해라! / 아직도 이것을 모르냐? / 무엇을 할 수 있는 단 몇 가지 방법!' 이런 식의 책들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몇몇 유튜브 채널들의 소위 '어그로'가, 책 제목의 세계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존재했던 셈이다.

 그는 자기계발서를 신뢰하지 않는다. 불신은 그의 군대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는 군대에서도 무언가 해보겠다고, 책을 읽곤 했다. 그리고 그가 읽었던 책들은 90% 이상 자기계발서였다. 군대가 가지고 있는 책들은 자기계발서와 판타지 소설이 주를 이룬다. 병사들도 어려운 책을 읽고 싶어하지 않는다. 군대라는 상황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가 크기 때문에, 굳이 책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도 판타지 소설이나 자기계발서와 같이 술술 읽히는 책들만 읽었다. 혹시나 병사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사고를 일으키진 않을지, 쌓여있는 자기계발서와 판타지 소설들은 군 수뇌부가 병사들을 위해 마련한 정신적 낙원이자 도피처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군대에서 100권 가까운 자기계발서들을 읽었다. 읽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자신이 자기계발서를 완독해나갈 때마다 성장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남는 것이 없다. 읽을 때 잠시 열정과 기분을 고취시키는 기능 뿐이다. 또한 자기계발서는 사회 현상이나 구조에 대해서는 깊게 다루지 않는다. '열심히 해라! 지금 당장 행동해라! 그러면 나처럼 될 수 있다!'라고 주입할 뿐이다. 계속 읽다보면 자기 자랑같이 읽히는 경우도 꽤 있다. 자기계발서 저자들이 훌륭한 것은 잘 알겠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할까? 왜 그렇게 행동해야만 성공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고 세상은 왜 이렇게 형성되고 흘러가고 있을까? 자기계발서는 그의 근본적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도서관을 수없이 들락날락거렸는데도, 도서에 붙어있는 분류번호가 어떤 체계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서관 벽에는 십진분류체계 KDC가 크게 붙어있다. 그는 사진을 찍는다. 이 분류 체계에 익숙해진다면 도서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그의 독서에도 도움이 될 터다. 

 그가 읽었던 자기계발서들은 주로 KDC 180대 윤리학과, 810 한국문학 등에 포진해 있다. 분류 번호, 책 제목, 목차 등을 훑으면 그가 군대에서 읽었던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얼마나 닮아있는지 파악이 가능하다. 그는 주로 KDC 300, 400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의 두꺼운 도서들을 빌린다.

 

 


 

 

 그는 자신이 항상 매고 다녔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닌다. 매 2주~3주마다 그는 이 가방에, 14권에 가까운 책들을 넣어 돌아간다. 원래 공공도서관 규정에는 1인당 7권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그는 책 욕심이 과해서, 그의 가족에게 부탁해서 대출증을 만들게 했다. 가족끼리 대출증을 연동하면, 당사자가 가지 않더라도 다른 가족이 대출을 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2명분인 14권을 빌려간다.

 

 14권의 책이 들어가면 배낭은 꼿꼿이 선다. 배낭을 어깨에 메는 순간 묵직한 부피와 무게가 느껴진다. 어깨가 짓눌리고, 발걸음이 느려지지만 그의 마음만은 날아갈 듯 기쁘다. 그는 방전된 배터리가 완충된 것처럼 기분이 좋다. 앞으로 3주간 그의 마음이 일용할 양식을 얻었다. 그가 다음 도서관 방문까지 14권의 책을 다 읽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14권은 커녕, 10권을 읽은 적도 없다. 기껏해야 5~7권 정도다. 그래도 그는 항상 14권을 꽉 채워서 빌린다. 목표를 높이 잡아야 반이라도 간다고, 14권을 빌리기 때문에 5~7권이라도 읽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읽다가 못 읽은 책은, 같은 사람이 바로 다시 대출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가족 회원 명의로 바꿔 대출한다. 그러면 예약한 사람이 없는 경우, 그가 계속해서 책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가끔씩 그가 다시 빌리고 싶은 책을 누군가가 예약해서 반납해야 하는 때가 생기면, 그는 속으로 짜증이 난다.

 

 도서관 직원들이 여럿이고 대화는 거의 없으므로 안면이 튼 직원은 없지만, 2주~3주마다 출몰해서 돈가방에 현금 다발을 챙기는 마냥 책을 쌓아 어깨에 메고 가는 그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