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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93 - 영어 발음

 설명회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간다. 그는 방장을 캠리에 태우고, 근처 쇼핑몰 푸드코트로 향한다. 다른 사람을 태우는 것은 처음이므로 그는 약간 긴장한다. 다행히 주차까지 잘 마친다.


 그와 방장은 푸드코트에서 저렴한 음식을 먹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방장은 외국 생활을 오래 했다. 동남아에서 유학을 했고, 한국에서 지내다가 지금은 호주 영주권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그도 마찬가지이지만, 외국에서 홀로 생활하다 보면 약간은 염세적이고 방어적 태도를 갖게 된다. 그는 한인들과 충돌을 많이 한 직후였기 때문에, 방장과 말이 잘 통한다. 방장이 한국에서 갈등을 겪었던 주된 이유는 '영어 발음'이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식 영어를 좋아한다. 최근에는 영국식 영어에 노출이 많아지면서, 영국식 영어도 좋아한다. 혀가 골뱅이처럼 꼬이면서, 물이 흐르듯 말하는 미국식 영어를 들으면 감탄한다. 또, 정반대이지만, 딱딱 끊기면서 절도 있게 말하는 정통 영국식 영어를 들어도 감탄한다. 영어의 본고장인 미국과 영국의 영어를 동경하는 셈이다. 문제는, 미국식/영국식 영어만이 진정한 영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방장은 동남아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에, 동남아 특유의 영어 발음을 습득했다고 말한다. 된 소리와 유음, th 발음이 강한 영어다. 이병헌 / 강동원 / 김우빈 배우가 출연한 영화 '마스터'를 보면, 이병헌 배우가 필리핀 영어를 구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영어를 저런 식으로 하느냐는 반응이다. 영화에서 이병헌 배우는 th발음과 ㄹ발음을 어색할 정도로 강조한다. Childern을 [췰드런] 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촤일드ㄹ런] 으로 발음한다. 이는 필리핀 영어를 정말 제대로 구사한, 명연기다.


 영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의 연설에 대한 반응을 봐도 알 수 있다. 이 연설을 들은 미국인과 한국인의 반응은 극명하게 나뉜다. 한국인들은, 영어를 못하는 중학생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반해, 본고장 미국인들은 정말 지적인 영어라고 이야기한다. 지적인 발음과 열등한 발음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다. 한 가지 영어 발음을 동경하고, 그 발음만을 숭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이다.


 유학파에 영어가 능통하니, 방장은 한국에서 영어 강사일을 찾는다. 그런데 방장의 동남아식 영어 발음을 듣고, 한국의 영어 학원들은 방장을 깔보았다고 한다. 심지어 면접 때 동화책을 가져와서, 앞에서 읽어보라는 학원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방장은 '멋있는' 영어 발음을 익혀야 했고, '멋없는' 동남아 발음은 숨겼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며, 깨닫는 바가 있다. 그도 워킹 초기에는 외국인과 영어를 숭배하다시피 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깔보고, 영어 발음이 이상한 이들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의 영어 실력이 조금씩 향상되면서, 그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다. 그는 S와 C  발음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고, R과 L 발음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S와 C가 모두 ㅅ으로 발음되며, R과 L은 모두 ㄹ로 발음된다. 그의 모국어에는 없는 이 차이들을 발음해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언어 습득을 넘어선 경험과 노력이 필요하다.


 발음을 가지고, 타인을 놀리는 경우가 있다. 외국의 한 방송에서, 아름다운 모델과 중후한 남성 진행자가 동양인들의 발음을 흉내 내면서 눈을 찢었다. 랄랄라~, 동양인이 하는 대로 R을 ㄹ로 발음해야 한다며 깔깔거린다. 무식하고, 상대할 가치가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그런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본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모국어를 쓸 때의 성향이 영어를 사용할 때 발현된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얼추 그 사람의 국적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한국인의 영어, 일본인의 영어, 인도인의 영어, 필리핀인의 영어, 프랑스인의 영어, 독일인의 영어, 러시아인의 영어 등 상당히 정확한 확률로 구별해낼 수 있다. 라디오스타에서 박준형 가수가 보여준, 국가별 영어 발음 및 억양 묘사는 대단하면서도 현실적인 묘사다. 박준형 가수는 세심한 관찰력의 소유자다.



 모국어와 최대한 가깝게, 실제로 네이티브와 같이 영어를 발음하면 당연히 좋다.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식의 영어 발음을 천대할 근거는 없다. 그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돌아보았을 때,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발음으로 영어를 하면서도 그보다 잘 사는 외국인의 사례는 넘칠 정도로 많다. 오히려 그보다도 더 잘 소통한다. 소통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의 발음 차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사투리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발음에 따라 누군가를 차별, 속단하는 경향이 적은 듯하다. 오히려 모국어가 아닌 이들이, 잘못된 기준을 설정하여 그 기준과 다른 발음들을 경시하고 천대한다. 그는 방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방장이 이야기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이때부터 그가 영어를 대하는 태도가 크게 바뀐다. 그는 멋있는 발음을 구사하는 영어에서, 뜻 전달을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한 영어로 선회한다. 발음을 가지고 남을 속단하는 습관도 버린다. 방장과의 만남과 이야기는 그에게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그와 방장은 아쉽지만 작별 인사를 나눈다. 며칠 뒤 멜버른으로 떠난다는 말에, 방장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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