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재설치를 맡은 한국인 인부들은 총 10명이 조금 안 된다. 그는 단기 알바 공고를 보고, 워홀러들이 대부분일 것이라 생각했다. 위치는 도심이고, 시급도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이트 카드 발급 과정이 까다롭게 바뀌어서, 화이트 카드를 소지한 워홀러가 드물다. 또한, 애초에 워홀러를 많이 뽑으려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한국인 인부들 중 가장 어린, 유일한 워홀러다.
기술자, 출장 온 몇몇을 제외하면 다들 멜버른 한인 사회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로 보인다. 2명씩 조로 찢어지기 전 아침에 모이면, 인부들은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한다. 아이 키우는 이야기, 회사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다들 멜버른에서 자리 잡아 본업이 있다. 최소 영주권자이며 시민권자도 있을 것이다.
그와 면접을 진행했던, 중간 매니저 역할을 하는 한국인이 중심으로 보인다. 그는 이 사람을 편의상 매니저라고 생각한다. 매니저이긴 하지만, 이벤트 청소 당시 워홀러들을 갈구던 매니저와는 전혀 다르다. 매니저는 한국인 인부들 사이에서 소통 창구 역할까지 담당하는 중심축이다. 다른 한국인 인부들도 어리고 젊은 워홀러인 그에게 가끔 말을 걸며 흥미를 보이긴 했지만, 매니저가 가장 부드럽게 다가오고 불편한 점은 없는지 등 신경을 많이 써준다.
그는 매니저와 사이가 좋아지면서,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매니저의 말에 따르면, 그의 예상대로, 일을 하는 인부들 대부분은 멜버른에 정착한 한국인들이다. 매니저 본인도 호주의 한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IT회사에서 통계 관련 일을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흐릿하다. 매니저는, 멜버른 한인 사회에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으나 마음이 맞아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들이 있다. 그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들과, 주말이나 시간이 날 때 부업이나 용돈벌이 겸 해서 이런 식으로 가끔 일을 한다고 한다. 다들 본업이 있기 때문에, 에어컨 분해 및 재조립 일은 주말 포함 며칠 동안 중점적으로 하고 빠르게 빠진다. '단기 알바'인 이유다.
한국인 인부들은 그를 제외하면 모두 30대에서 40대의 남성들이다. 전형적인 남성의 모습, 처음에는 무뚝뚝해 보여 다가가기 힘들지만 막상 친해지고 나면 우스갯소리도 잘하는 정이 많은 이들이다. 가뜩이나 그는 무리 중 유일한 20대 워홀러였으니, 인부들 사이에서 은근히 관심과 이쁨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매니저와 친한 한국인 중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가 한 명 있다. 피부는 구릿빛에, 어깨가 직각이고 등이 매우 넓다. 팔다리도 단단하지만, 몸통이 특히 튼튼하며 인상이 약간 무섭다. 매니저는 그에게 다른 이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강렬한 인상의 남자는 이력도 강렬하다. 한국에서 태권도 선수를 하다가, 현재는 호주에 정착했다고 한다. 겉모습은 가장 무서웠지만, 함께 있다 보니 가장 감정 표현이 많고 재밌는 사람이 바로 태권도인이었다.
매니저와 태권도인을 비롯한 멜버른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지인들끼리 조를 편성해서 일했다. 그는 주로 기술자나, 다른 사람들과 일한다. 그래서 매니저와 태권도인 등의 사람들과는 아침 일하기 전, 그리고 점심 먹을 때만 만났다.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매니저와 태권도인 무리의 대화와 분위기를 보면 어느 정도 느낌을 알 수 있다. 영어가 유창하진 않으나, 다들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영어를 구사하는 가장들이다. 특히 Listening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하는 경우도 있다. 매니저는 항상 엷은 미소를 머금고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가끔씩 명언을 할 때가 있다. 그는 매니저가 했던 영어 관련 명언을 기억한다.
"돈 쓰는 영어는 쉽다. 돈 버는 영어가 어려울 뿐이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크게 공감한다. 상점에 들어가서 돈을 쓰겠다고 하는데, 영어를 못 한다고 내쫓을 리는 없다. 물론 영어가 서투른 동양인들이 서브웨이를 꺼리거나 외국인 점원 앞에서 위축되는 경향이 없진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소비 활동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자리는 전혀 다르다. 영어가 안 된다면, 일자리를 구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야말로 돈 쓰는 영어는 쉽고 돈 버는 영어는 어려운 것이다.
일주일 남짓의 단기 알바라서 그런지, 장소가 호주여서 그런지, 삼사십 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들 막내인 그에게 존댓말을 쓴다. 매니저와 태권도인 무리 내의 지인들끼리 가끔씩 반말을 하지만, 이조차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하는 경우는 잘 없다. 인부들의 대표 격인 매니저가 존대를 하니, 기술자와 출장 온 다른 사람들 등 모두가 모두에게 존대를 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본 적이 있다. 브리즈번 이벤트 청소에서 함께 청소하던 워홀러들이 그랬다. 이벤트 청소 당시의 워홀러들은 다들 일도 잘하고 매너도 지키는, 그가 봤던 최고의 한국인들이었다. 삼사십 대의 나이임에도 존대하고, 멜버른에 정착했지만 한인 사회에 나서진 않고 각자 분야에서 열심히 생활하며 가끔씩 마음 맞는 이들끼리 모이는 영주권/시민권자들을 본다. 그는 속으로, 에어컨 알바에서 만난 한국인들이 이벤트 청소 때 만났던 워홀러들처럼 좋은 사람들일 것 같다고 생각한다.
'회상 > 호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5 - 지각, 우버 (0) | 2021.10.04 |
---|---|
194 - 에어컨 프로젝트 팀 (0) | 2021.10.04 |
192 - 에어컨 분해, 재조립 (0) | 2021.10.04 |
191 - 단기 알바 구직 (0) | 2021.10.04 |
190 - Round about (0) | 2021.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