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 일하는 한국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멜버른에 자리 잡고 정착해서 살고 있는 이들(영주권 이상), 그렇지 않은 이들이다. 멜버른에 정착하지 않은 이들은 약 서넛으로, 에어컨 제조사인 한국 모 대기업에서 직접 파견 온 기술자 1명 / 이외 모 대기업 협력사에서 멜버른으로 출장 온 듯한 직원 2명 정도다.
기술자는 40대로 보이며, 피부가 까맣고 안경을 썼다. 영어가 유창하진 않으나, 문제가 발생한 에어컨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배선을 다룰 줄 알기 때문에 호주인 관계자들도 기술자의 말에 집중한다. 기술자는 몸이 약간 말랐으나 눈빛이 살아 있어서, 그는 속으로 기술자의 성격이 조금은 깐깐할 것이라 생각한다. 기술자가 직접 시범을 보이며 에어컨을 뜯을 때 깐깐한 성격이 조금 묻어 나오긴 하지만, 그런 깐깐한 성격은 기술자 본인에게만 국한될 뿐 그를 포함한 다른 한국인 인부들에게는 영향을 준 적은 없다. 한국에서도 직장 생활을 했다는 매니저는, 멜버른 정착 한국인들을 대변하다시피 하며 기술자와 대화한다. 매니저는 일을 시작한 지 며칠 뒤부터, 기술자를 '책임' 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 듣는 말이라, '책임'이 기술자의 이름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책임'은 회사의 직급이었다.
기술자 외에도, 다른 회사에서 출장 온 한국인이 둘 있다. 그가 일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두 사람의 소속은 불명확하다. 두 인물이 멜버른으로 출장을 왔다는 것은 분명하나, 기술자와는 초면으로 보이며 상하관계도 아니다. 같은 회사가 아닌 협력사일 것으로 추측한다. 출장 온 두 인물은, 기술직이 아닌 듯하다. 배선을 다루지 않고, 그와 멜버른 한인들과 같이 조립과 해체를 돕는다. 경영지원직이나 영업직 인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되지만 확실하지 않다.
기술자는 캐쥬얼한 양복을 입지만 왠지 어색하다. 에어컨 작업을 하며 목장갑을 끼고 공구를 쥐는 순간 어색함이 사라지고, 손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아우라가 나타난다. 그동안 기술자가 해온 일들이, 기술자의 몸에 배고 분위기까지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술자는 일을 하는 동안 거의 대부분 캐쥬얼한 양복을 입고 일한다. 외부 현장에 파견 나온 상황이니만큼, 보여지는 모습에도 신경을 쓴 것이리라.
기술자와는 반대로, 출장 온 인원들은 양복이 잘 어울린다. 출장 온 인원들은 일을 진행하면서 점점 양복에서 작업복으로 복장을 바꿨지만, 첫날과 마지막 날 넥타이를 맨 까만 양복차림 모습을 그는 기억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직장인처럼 양복이 잘 어울린다. 피부, 얼굴색, 머리 스타일로 보아도 과하지 않게 꾸민 모습이다. 하지만 출장 온 인원들이 목장갑을 끼고 에어컨 조립이나 해체를 시작하면, 기술자가 양복을 입었을 때처럼 뭔가 조화롭지 않은 삐걱거림이 느껴진다. 출장 온 인원들의 손놀림과 몸놀림은, 몸으로 일을 하는 현장에 익숙지 않은 느낌이다.
대화에 있어선, 출장 인원들이 기술자보다는 편하다. 기술자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말을 붙이기가 쉽지 않으며 기술자도 말이 적은 편이다. 출장 온 인원들은 인상이 부드럽고, 농담도 많은 편이다.
멜버른에 정착한 영주권자 이상의 한국인들, 기술자와 출장 온 인원들, 그(유일한 워홀러)
한국인 인부들의 구성이다. 다들 서로 존대하며 우호적이다. 매니저가 모든 이들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한국인 기술자와 한국인 인부들이 일을 도맡지만, 외국인도 존재한다. 에어컨 재설치라는 프로젝트의 관리자가 있다. 관리자의 국적은 유럽인데, 그가 브리즈번 공장에서 보았던 뉴질랜드 출신 직원과 비슷한 짙은 구릿빛의 피부다. 관리자는 한국 대기업과 호주 건설사 사이에서 에어컨 관련 이슈를 해결하는 중재자로 보인다. 에어컨을 재설치하는 팀에서, 공식적인 서열로는 이 관리자가 1위다. 관리자는 당연히 한국말을 못 하므로, 관리자와는 영어로 소통한다. 주로 매니저와 기술자가 관리자와 대화한다. 관리자는 한국인 인부들의 위치를 계속해서 파악하고, 호주 건설사 측의 요구사항 등을 전달하며 바쁠 때는 본인도 직접 에어컨을 만진다.
관리자는 인상도 좋고 온화했으나 딱 한번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다. 호주 건설사 관리직 인원들, 에어컨 재설치팀이 전부 한 방에 모인 적이 있다. 건설사 측에서는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인지, 계속해서 설명을 요구했다. 답답했던 매니저와 기술자는, 둘이 한국말로 제대로 말을 맞춘 뒤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때, 스트레스를 받던 관리자가 투정 부리듯 소리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은 알아듣지 못하니, 앞으로는 자신 앞에서 한국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듣고 매니저와 기술자는 즉시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관리자는 착한 사람이지만, 스스로 지켜야 할 위치가 있다. 건설사 직원들 앞에서, 명시적인 서열이 자신보다 아래인 팀원들이 자신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복잡해 보이지만 정리해보면 이렇다.
고층 빌딩 공사를 진행하는 호주 건설사, 해당 건설사가 사용하는 에어컨은 한국 모 대기업 제품이다.
건설사 측 인부가 시공을 잘못해서 에어컨이 오작동을 일으켰다.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기업의 기술자 / 협력사 직원들이 파견되고 인부들은 현지 한국인을 쓴다.
한국인 에어컨 팀과, 호주 건설사 사이에서 중재 및 조율을 하는 관리자(해당 건설사 소속 X)가 있다.
에어컨 재시공팀은 호주 건설사와는 분리된 별개의 한국인 팀이다. 매니저를 포함한 멜버른 정착 한인들은 일주일 정도 단기 알바 후 빠르게 빠진다. 출장 인원들이 그 다음으로 빠지고, 기술자가 가장 오래 남긴 하지만 기한 내에 최대한 빠르게 에어컨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관리자도 다음 일정이 잡혀 비행기까지 예약했다. 에어컨 재시공팀의 목적은 최대한 빠르게,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으면서 할 일만 하고 빠지는 것이다. 건설사가 알아서 좋을 것이 없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하고, 피아 식별을 확실히 해야 한다. 믿을 수 있는 외국인은 오로지 관리자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복잡한 건설현장 내의 이해관계를 파악하지 못했고, 이후 한 가지 실수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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