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에어컨 배선을 볼 줄 모르고, 전문적인 공학 지식도 없다. 아무도 그에게 그런 지식이나 기술을 요하지 않는다. 주어진 일, 에어컨을 해체하고 조립하기만 하면 된다. 그도 호주 건설현장에서 나름 일하면서 손재주가 생겼는지, 단순히 에어컨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일 정도는 쉽게 느껴진다. 조를 나눠서 따로 다니고, 관리자와 기술자는 인부들에게 서두르라고 말하는 일이 없다. 적당한 속도로 에어컨을 분해하거나 조립하면 된다. 그는 브리즈번에서 일하며, 조쉬와 일하며 미친 듯이 바쁘게 일하는 상황을 몇 번 경험했다. 에어컨 일의 속도 정도는 거뜬하다.
물론 주의사항이 있다. 이미 페인트 시공이 완료된 곳이 많기 때문에, 에어컨을 해체 및 재조립하면서 벽을 긁어선 안 되며 장갑으로 짚는 것도 삼가야 한다. 에어컨 해체 시에는 반드시 나사를 껍데기 안에 모아놓아 분실하지 않아야 한다. 약간의 주의사항만 지키면 에어컨 해체 및 조립은 쉽다. 인부들 사이에서, 막내의 손만 닿으면 에어컨이 알아서 해체된다며 에이스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그는 칭찬에 더욱 신이 난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 지 며칠 뒤, 그가 늦잠을 잔다. 그의 숙소에서 멜버른 도심까지는 대중교통으로 1시간 반 이상 걸린다. 일은 오전 8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그는 적어도 6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그가 눈을 떠 보니, 시간이 7시 반이다. 시계를 보자마자, 그는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한다. 무슨 짓을 해도 현장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다. 당장 준비하고 나가도 한 시간 이상 지각이다. 그는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왜 늦게 일어났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늦은 거 그냥 자버릴까 등이다. 그리고 슬그머니, 못된 생각이 떠오른다. 어차피 늦었는데 그냥 가지 말까, 어차피 그만두면 두 번 다시 안 볼 텐데 그냥 연락 끊고 잠수 타버릴까 하는 생각이다. 그가 상당히 혐오하는 생각이었지만, 막상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그려보니 회피하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든다. 다행히도 그는 이성을 찾는다.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행동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행동은 옳지 않다, 마땅히 책임지고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겠다는 확신이 서자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그는 망설임 없이, 우버 택시를 부른다. 우버는 호주의 콜택시다. 호주는 인건비가 비싸니, 우버도 상당히 비싸다. 그의 숙소에서 멜버른 도심까지 우버를 탄다면, 60불 이상의 금액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 어서 빨리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버를 타고 가면서, 매니저에게 카카오톡을 보낸다. 너무 죄송하지만 늦잠을 잤다. 우버를 탔지만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다. 매니저에게서 전화가 온다. 우버를 탔냐며, 느긋하게 와도 된다는 전화다. 그는 최대한 빨리 가겠다고 말한다.
우버를 탔음에도, 도심은 차가 막힌다. 구글 맵으로 검색했을 때 차량으로 40분 걸린다던 거리가 1시간 이상 걸린다. 그는 9시가 넘어 현장에 도착한다.
매니저는 그에게, 오늘은 정기적인 안전 교육이 있는 날이라 이를 이수하고 현장에 들어와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인원들은 모두 8시 교육을 듣고 일하는 중이다. 마침 10시에도 교육이 있다. 그는 잠시 대기했다가, 10시에 1층 사무실에서 안전 교육을 듣는다. 호주 건설사 측 백인 직원이, 프로젝터로 영상을 틀어놓는다. 영상은 일할 때 안전모를 잘 써야 하고, 주위 위험요소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등의 기본적인 안전 교육이다. 약 10분 정도의 영상이 끝나고, 직원이 내미는 서류에 서명한다. 직원은 이제 일하러 가도 좋다고 말한다. 호주는 이런 식으로, 건설현장 안전 관리에 철저하다. 이전의 그는 외곽에서 일했기 때문에 관리감독이 덜했지만, 도심의 고층 빌딩 현장은 법규를 제대로 지킨다.
매니저는 그에게, 어느 층으로 가서 기술자를 도와달라고 톡을 보낸다. 그는 바삐 해당 층으로 가서 합류한다. 기술자는 그에게 왔느냐며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맞이한다. 그는 더욱 열심히 기술자를 보조한다.
잠시 쉬는 시간, 매니저가 그를 찾아온다. 매니저는 도심까지 우버 비용이 얼마 들었느냐고 묻는다. 60불 정도 나왔다고 답하니, 매니저는 "비싼 잠 잤네요." 라고 말한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잘못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매니저는 잠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시 일하러 떠난다.
이날 일이 끝나기 직전, 그는 한 층에서 출장 인원들과 마주한다. 출장 인원들도 그가 늦었으며 우버를 타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다들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부끄러움이 더 크다. 출장 인원 중 한 명이 그와 이야기하다가, 20불짜리 지폐를 건넨다. 지금 당장 가진 현찰이 이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이때 놀람과 동시에,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졌던 것 같다. 받지 않으려 했지만, 출장 인원은 우버 비용이 너무 많이 나왔다며 그의 손에 20불을 쥐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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