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유예 기간이 끝나가고, 어느덧 연말이 다가온다. 날이 추워져서, 그는 독서실에 갈 때마다 패딩을 입는다. 곧 해가 지나면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텐데, 그러면 서류 합격률이 더 떨어지지 않을까. 안 그래도 낮은 서류 합격률이, 나이까지 많아서 더 떨어지진 않을까. 그는 자신이 아직 한창이다 못해 어리다고 생각하지만, 기업은 더 싱싱하고 어린 20대 초반의 지원자들을 선호한다. 기업 입장에서 그는 어느새 맛이 간, 시들시들한 지원자인가 보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자신은 아직 늙지 않았노라고, 나이만 조금 먹었을 뿐 오히려 열정과 패기는 어린 지원자들보다 더하다고 자부한다.
어느덧 한 해가 다 지나갈 무렵, 그에게 서류 합격 메일이 도착한다. 10번째 기업이다. 10번째 기업은 무슨 생물 관련 회사 같은 느낌이 나는데, 축산/사료 등을 취급한다고 한다. 물론 그는 축산업과 사료 관련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 하지만 이력서를 작성할 때, 그는 혹시나 해서 호주 워킹홀리데이 당시 소고기 공장에서 일했던 내용을 적어놓았다. 거기에 더해, 그가 직접 작성한 읽은 도서 목록까지 첨부해서 서류를 지원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독특한 경험과 행동이, 면접관의 눈길을 끈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10번째 기업의 이번 공고 지원자가 원체 적었던 것일 수도 있다.
10번째 기업은, 업계도 특이하고 채용 공고도 특이하다. 직무의 자세한 이름이 없고, 일하는 부서 이름으로 직무 이름을 대신했다. 그가 지원한 부서이자 직무는, '전략자원본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입장에서는, 왠지 멋있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전략지원사업부라는 이름 옆에, 약간의 직무 설명이 적혀 있다. 원부자재 수급 및 구매관리 / 협력업체 선정 및 평가관리라고 되어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꽤나 힘 있는 위치에서 무언가를 관리하고 평가하는 것이리라.
10번째 기업은 서류 합격자인 그에게, 인성 검사 메일을 보냈다. 40분 정도 걸리는 인성 검사는, 마침 꽤나 유행한다는 성격 테스트 비슷한 문항들로 가득 차 있다. 답변의 정도는 1부터 5까지다. '매우 부정 - 부정 - 보통 - 긍정 - 매우 긍정' 이 5가지 범주 내에서 선택해야 한다. 답변해야 할 문항은 어렵지 않으나, 과연 어떻게 답변해야 10번째 기업이 좋아할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괜히 기업의 입맛에 끼워 맞추겠노라 자신을 속이기 시작하면, 잘못했다간 신뢰도가 어그러져 인성 불합격이 뜰 수도 있다고 한다. 그는 10번째 기업의 취향을 파악하려다, 그냥 내려놓고 자신이 고르고 싶은 대로 고른다.
인성 검사를 실시하고 12시간도 지나지 않아, 면접 안내 메일이 날아온다. 인성 검사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유형일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대놓고 빠르게 결과가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던 그다. 인성 검사 결과를 실제로 보긴 한 건지, 그냥 다른 기업들 다 하니깐 따라서 절차 하나 끼워 넣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하지만 그는 일개 취준생일 뿐이다. 어쨌든 인성 검사는 합격했다는 말이겠거니, 그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면접에 임하고자 한다. 10번째 기업 1차 면접은 화상 면접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10번째 기업은 사람이 급한 것인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예정보다 빠르게 면접을 볼 수 없겠느냐고 묻는다. 그는 당연히 수락한다. 그의 수락과 동시에, 면접은 기존 일정보다 이틀 앞당겨진다. 그는 은근히 감이 둔한 편이지만, 이런 쪽에서의 잔머리는 꽤 돌아간다. 대강 치러진 인성 검사도 그렇고, 대면이 아닌 비대면 면접도 그렇고, 갑작스레 면접 일정을 변경하는 것도 그렇고, 10번째 기업은 꽤나 조급해 보인다. 가뜩이나 면접 준비 기간이 줄어든 셈이니, 그는 재무제표 분석과 면접 준비 자료를 만드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을 쏟지는 않는다. 면접이 꽤나 널널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드문 경우지만, 이 경우만큼은 그의 감이 옳았다.
10번째 기업, 전략자원본부 신입 면접 (비대면 Zoom 면접)
면접자 : 그 혼자
면접관 : 총 2명, 모두 남자
안경을 꼈고, 몸집이 크며,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나 흰머리가 굉장히 많은 면접관 1
안경도 끼지 않고 말랐으며, 흰머리가 보이지 않는 30대 후반~40대 초반 면접관 2
면접은 면접관 1이 주도했으며, 질문도 면접관 1이 주로 한다. 정해진 시간, 그가 메일로 받은 Zoom 링크를 타고 들어간다. 면접 대기실 화면에 입장함과 동시에, 잠시 화면이 까맣게 변하더니 이윽고 면접관들이 각각 화면에 나타난다.
면접관 일동 : 안녕하세요.
그 : 안녕하십니까!
면접관 1 : 네, 잘 들리시나요?
그 : 네, 잘 들립니다! 잘 들리십니까?
면접관 1 : 네, 잘 들립니다. 지금부터 면접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얀 얼굴 씨, 자기소개부터 해주시겠어요?
그 : 네, 안녕하십니까! 10번째 기업 전략자원본부에 지원한 지원자 하.얀.얼.굴. 입니다! 저는 2가지 강점을 통해 저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한 실천력입니다. 저는 호주 워킹홀리데이 당시 ... 두 번째, 친화력입니다. 저는 취미인 공놀이를 통해 친화력을... 이상, 두 가지 강점을 바탕으로 10번째 기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지원자 하.얀.얼.굴. 입니다. 감사합니다!
면접관 1 : 네 반갑습니다. 으음...
화면 속 면접관들은, 하나같이 무언가를 집중해서 보고 있다. 아마도 그의 이력서와 제출 서류인 듯하다.
면접관 1 : 하얀 얼굴 씨, 소고기 공장에서 일을 했나요?
그 : 네, 맞습니다.
면접관 1 :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한 건가요?
그 : 음,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가축이 도착하면 바깥의 Stockyard에서 관리하다가 공장 안으로 몰아넣는 일을 했습니다. 또한, 가축이 도축된 이후 내장을 분류하여 담는 일, 살코기와 지방을 분류하여 담고 포장하는 일도 했습니다.
면접관 1 : 본인이 직접 도축하기도 했나요?
그 : 도축의 경우는, 칼을 다룰 수 있는 숙련된 인원들이 담당했습니다. 도축 과정을 본 적은 있지만, 제가 직접 하지는 않았습니다.
면접관 1 : 음, 그래요...
10번째 기업의 채용 공고에는, 축산 관련 전공자, 축산업 종사자를 우대한다고 적혀 있다. 그가 소고기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나름 축산업 종사자처럼 비쳤던 모양이다.
면접관들은 그의 이력서를 보고 있는지, 말이 없다. 침묵이 길어진다 싶을 무렵, 다시 질문이 날아온다.
면접관 1 : 하얀 얼굴 씨, 책을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그 : 네, 맞습니다!
면접관 1 : 아니, 제가 아까 자료를 봤는데, 이게 왜 안 열리지. 아래 정리해놓은 것을 보니까 올해에만 벌써 달에 5권씩 읽었더라고요. 제일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뭔가요?
그 : (무슨 책을 말할까 고민하다) '몰입, Flow'라는 책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면접관 2 : 아... 여기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책이네요.
면접관 1 : 근데 이 파일이 왜... 아 열렸네요. 이 정도로 책을 읽는 분은 굉장히 드문데... 허 참.... 이 책들을 다 어떻게 읽은 거죠?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나요? 아니 이 책들을 전부 다 사서 본 거예요?
그 : (질문이 한 번에 여럿이라 당황스럽지만) 코로나 이후로, 바깥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실내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그동안 미루어왔던 독서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읽다 보니, 한 달에 3권 이상씩 읽게 된 것 같습니다. 해당 도서들을 제가 구매한 것은 아니고, 모두 공공도서관에서 빌려서 본 책들입니다.
면접관 1 : (말없이 화면을 보고 있다)
면접관 1과 2는, 그가 답변을 할 때도 계속해서 화면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아마도 그가 제출한 읽은 도서 목록을 자세히 보고 있는 듯하다. 이런 자료를 제출한 것이 신기해서인지, 아니면 검증되지 않는 그의 자작 자료에서 오류를 찾아보려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면접관 1 : 아까 이야기한 책 외에, 인상 깊게 읽은 다른 책 하나에 대해 이야기 주세요.
그 : (그는 자신의 독서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신이 난다) 음... 이타적 유전자라는 책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해당 도서는, 리처드 도킨스의 도서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독자들의 잘못된 반응에 대한 항변으로 나온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조금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면접관 1 : 네, 해보세요.
그 : (고삐가 풀린 듯이) 이기적 유전자는, 모든 생명체를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유전자 전달 기계라고 비유합니다. 생물의 행동은 모두 유전자의 조종으로 이루어진다는 설명인데, 이러한 설명을 듣고서는 좌절하는 독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유전자의 명령을 듣는 수동적인 기계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결국 다 유전자의 조종이라는 것인데 무슨 의미가 있나. 모든 것은 유전자의 조종이니 내가 이제부터 비뚤어지게 살아도 유전자의 탓이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이타적 유전자의 저자인 매트 리들리는,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유전자의 명령을 따른다 하더라도, 유전자의 이기심이 이타적 행동으로 발현될 때가 많다며 예시를 듭니다. 군체를 이루어 사는 개미나 벌 등을 비롯해서, 이기심에서 비롯된 이타적 행동이 생태계에는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들을 볼 때, 유전자의 결정이 이기적이라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책입니다. 그래서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면접관 1 : (그의 답을 듣기는 한 것인지) 그렇군요.
이 부분에서 그는, 자신이 읽은 책에 너무 심취하고, 답변하는 자신의 모습에 너무 고취된 경향이 있다. 매일 독서실에 앉아 홀로 책만 읽었던 그다. 그런 그로서는, 이런 식으로 화면 너머 만나는 면접관들과의 대화마저도 신이 날 만큼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와 대화가 부족했던 것일까. 그 자신도 이상하다 느껴지리만치, 그는 혼자 신을 내며 입이 터져 말을 많이 한다.
다행히도, 면접관들은 직무나 전공 관련된 깊은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면접관 1 : 네, 어느새 시간이 다 되었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면접관들에게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그 : (잠시 생각하다가) 음.... 오늘 제가 면접을 잘 보았는지가 궁금합니다. 면접관님들께서 보시기에, 제가 면접을 잘 보았다면 어떤 점에서 잘 보았는지, 또 부족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이고 당돌한 질문이다)
면접관 1 : (약간 당황한 듯) 아.... 허.... 하얀 얼굴 씨의 경우는, 음... 읽은 도서 목록을 이력서에 첨부해서 같이 제출한 점이 인상 깊었어요. 보통 다른 지원자 중에서, 이런 식으로 제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네, 읽은 도서 목록 파일을 첨부한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면접관 2님, 하실 말씀 있나요?
면접관 2 : (마지못해 답하듯이) 아... 저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책을 많이 읽은 지원자는 처음이네요. 아까 답변하는 것을 보아도 책을 많이 읽은 티가 나고... 저도 면접관 1님과 마찬가지로 해당 부분이 인상 깊었어요.
그 : (그저 신이 났다) 감사합니다!
면접관 1 : 네, 그럼 이상으로 면접 마치겠습니다. 곧 결과가 메일로 갈 거예요. 수고했어요.
비대면 면접이므로, 당연히 면접비는 없다. 그는 이번 면접에서, 이상하리만치 신을 내며 말을 많이 했다. 소위 말해, 나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면접관들은 전반적으로 말이 없었는데, 그를 인정한 것인지 아니면 딱히 꼬투리 잡을 것이 없어 조용히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면접 직후에는 자신이 면접을 잘 보았다며 기분이 좋았으나,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볼수록 너무 발화량이 많아 가벼워 보였던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면접은 정말로 알 수가 없다. 이튿날, 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 속 목소리는 10번째 기업 직원으로, 그에게 1차 면접 합격 소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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