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독서실을 등록하였고, 시설도 아주 만족스럽다. 문제는, 독서실에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다. 그의 동생은, 비교적 진로를 확실하게 결정한 듯하다. 동생은 가고 싶은 기업을 정해놓고, 그 기업의 문제집을 몇 권이고 사서 독서실에서 계속해서 푼다. 그는 화장실을 갈 때, 정수기에 물을 길러 갈 때 동생의 좌석을 힐끔 본다. 닫혀 있는 슬라이딩 도어 틈 사이를 눈여겨보면, 문제집을 열심히 풀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대견함과 질투가 섞인 감정이 든다. 그는 동생보다 나이만 많이 먹었을 뿐, 정신 연령이나 하는 행동은 오히려 더 어리다.
그의 동생은 질리지도 않는지, 문제를 계속해서 푼다. 그런 성실한 반복의 시간이 착실히 쌓이면, 느리긴 해도 그 결과가 확실히 나타난다. 동생의 책상 서랍에는 어느새 다 푼 문제집이 쌓이기 시작한다. 동생은 독서실에 매일같이 나오진 않는다. 그는 동생이 독서실에 나오지 않을 때, 몰래 동생의 자리에 가보곤 한다. 동생의 좌석 서랍에는 문제집이 10권 넘게 쌓여 있다. 그가 한 권을 펼쳐보니, 온갖 필기와 글씨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두터운 문제집의 모든 페이지가 똑같다. 그는 동생의 책상 위, 각종 것들을 적어놓은 듯한 노트를 펼쳐본다. 노트에는 각종 숫자, 알 수 없는 공식, 동생이 전공한 공학 도면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다. 공부하면서 글씨를 많이 써서인지, 동생의 글씨는 가지런하고 반듯하다. 어릴 적 그가 부모님의 글씨를 볼 때마다 느꼈던, 어른의 글씨체다. 그는 동생의 좌석과 노트와 글씨를 보며, 자신이 동생보다 못났다고 느낀다. (실제로 그의 동생은 졸업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했던 곳 중 한 곳에 취업한다)
동생과의 비교에서 이를 절실히 느낌에도, 그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다. 한쪽 분야로 전공을 들이 파지 않은 경영학도인 그는, 취업을 준비하는 이 시점에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나.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정해서 할 의지도 없는 것이 그다지 절실하지도 않은 것 같다. 비좁지만 안락한 독서실의 1인 좌석에 앉아, 그는 고민만 많다.
고민만 많던 그의 머릿속에, 해야 할 것이 딱 하나 떠오른다. 바로 독서다. 그는 군대 시절, 그리고 대학생 시절 때도 도서관을 꽤나 들락거렸던 축에 속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읽어 본 책은 하나도 없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취준생, 어쨌든 취준생은 시간이 많다. 어느 한 산업과 직무를 결정해서 치열하게 준비하고 들이 파지 않는 그로서는, 더더욱이나 시간이 남아돈다. 그는 독서를 하기로 결정한다.
독서를 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가 이전부터 독서에 관심이 있던 것도 있지만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점도 이유로 작용했다. 그는, 취업이든 인생이든 무엇이든 정보와 조언을 얻고 싶었다. 물론 그런 정보와 조언은, 주변 지인들이나 인터넷 검색으로도 알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정보가 아니라 실제로 적용할 수 있고 검증된 정보와 지식을 얻고 싶었다. 고루한 표현으로는, '옛 성현들이 그들의 삶으로 직접 증명해낸 정보와 조언'을 얻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도 못했으며 아무것이나 붙잡고 노력하고자 하는 절실함이 없었던 그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만 있다면, 자신이 정말 좋아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그것에 모든 것을 쏟을 의지는 갖고 있었다. 즉, 그는 지금 당장 자신이 처한 무지라는 어두컴컴한 상황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조금이나마 절박했던 것 같다.
그가 자신이 처한 무지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며 지푸라기라도 잡듯 우연히 선택한 것이 독서였다. 우연히 선택한 독서지만, 그는 자신이 읽을 책만큼은 신중히 골랐다. 같은 독서실에 있는 동생은, 목표를 명확하게 잡고 매일 성실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 동생과 같은 공간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계발/출간한 지 얼마 안된 신간을 배제하고, 문학도 되도록 배제한다. 그는, 비문학 중에서도 스테디셀러에 가까운, 비교적 검증이 된 책들 위주로 독서를 시작한다. 첫 시작은 '총,균,쇠'라는 책이었다. 계속된 독서를 하던 중 특히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라는 책을 읽으며, 그는 처음으로 글자를 통해 자신의 상황이 위로받는 느낌을 갖게 된다(그는 해당 책을 5번째 기업 PT 면접에서 언급한다). 운이 좋게도,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가 설정한 독서 방향은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
그는, 말 그대로 독서실에서 독서하는 취준생이 되었다. 가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독서실에서 공부를 해야지 독서를 하느냐는 핀잔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독서가 탄탄한 기반이 되고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했지만, 그러한 핀잔도 나름 일리가 있다고 느낀다. 독서는 물론 바람직하고 훌륭한 지적 활동이지만, 문제는 독서를 통해 눈으로 나타나는 효과나 결과물이 없다는 점이다. 취준생에게 필요한 것, 그리고 기업이 요구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증명과 성과다.
그렇다고 독서를 중단할 수는 없다. 그는 이미 독서의 맛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독서를 중단한다고 해서 딱히 다른 뭔가를 할 것 같지도 않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이 독서를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고민한다. 고민하던 차에, 그는 도서관의 분류표를 보고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기업은 숫자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어떤 분야의 어떤 책을 읽었는지를 숫자로 보여주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도서관의 분류표는, 세상의 모든 책들을 다 포함할 수 있는 방대하고도 세세한 기준을 정해놓았다. 도서관에서 도서를 검색하고 어느 서가에 있는지 찾을 때 사용하는 숫자가 바로 그것으로, KDC(한국 십진분류법)라고 한다. 도서관은, 비치되어 있는 모든 책들을 해당 분류표에 따라 분류해놓고 저장한다. 그는 이 점에서 힌트를 얻는다. 도서관은 가지고 있는 책들을 분류표에 따라 기재해 놓았으니, 그는 자신이 읽은 책들만 해당 분류표에 따라 기재해 놓으면 되지 않을까.
대강의 청사진이 그려지니, 그는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도서관의 십진분류법은 0번대부터 900번까지,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로 책을 구분해 놓았다. 그는 해당 분류를 워드 파일에 그대로 복사해 넣은 다음, 지금까지 자신이 읽은 책들이 어느 분류에 속해 있는지를 검색해 기입해 넣는다. 그가 읽은 책은 아직 100권도 채 되지 않는다. 당연히, 그의 읽은 도서 목록 기입은 꽤나 빠르게 끝난다.
읽은 도서 기입이 끝났지만, 그래도 개운치 않다. 탭을 쳐서 분류를 구분해 놓고, 그가 읽은 책들도 색깔을 다르게 해서 구분하긴 했지만 가독성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기업들이 좋아하는 숫자가 빠져 있다. 그는, 맨 아래에 표를 만들어 한눈에 보이기 좋게 숫자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0번대 총류는 몇 권, 100번대 철학은 몇 권, 200번대 종교는 몇 권, 300번대 사회과학은 몇 권,... 그 합계인 총 독서 수는 몇 권.
표를 작성해 한눈에 보기 좋게 만들어 놓으니, 그나마 낫다. 그는 자신의 동아줄이자 지푸라기이자 취미인 독서를,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 어필할 수 있는 자료로 작성했다는 점에서 큰 기쁨과 성취감을 느낀다. 그는 독서를 지속하면서, 읽은 도서 목록을 계속해서 갱신한다. 얼마 뒤부터는, 그는 이 독서 목록을 아예 자신의 포트폴리오로 삼아 이력서를 제출할 때 같이 첨부해서 제출해버린다. 스펙도 없고 잘난 이력 하나 없는 취준생인 그의 발악인 셈이다.
향후 그는 어느 시점에, 자신의 독서와 목록 작성 경험에 아예 살을 붙여서 자기소개서 답변으로 작성해버리기에 이른다. '관심 있는 분야에 몰입하고 결과를 내본 경험' 항목을 대비한 자소서다. 하지만 이는 꽤나 시간이 지난 후의 이야기다.
어쨌든 이 시기의 그는 자신이 작성한 '읽은 도서 목록'을 이력서에 첨부해서 서류를 난사한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어이없으면서도 독특한 그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는 기업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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