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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

11번째 기업 (다른 회사명 기재, 서류 합격, 인적성)

 해가 바뀌었다. 그는 여전히 취업준비생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그의 신년 목표는 무엇인가. 당연히 취업이다. 그는 이번 새해에, 취업에 성공하기만 해도 기뻐마지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취업 활동은 계속된다. 기업들의 신입 채용 절차는, 아무리 짧아도 한 달에서 두 달 가까이 걸리게 마련이다. 하반기 공고에 합격했지만, 해가 바뀐 이후에도 하반기 채용 절차가 진행되는 회사가 아직 하나 남아있다. 이전 해에 그가 미치도록 난사한 서류들 중, 그에게 남은 마지막 총알이다.

 

 

 11번째 기업은 기계 제조업체로, 창사한지 20년이 조금 넘었다.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기보다는, 이제 막 시작한 기업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11번째 기업은 꽤나 자신만만하고 패기가 있다. 원래 11번째 기업의 초창기 사명이 있었는데, 인체를 분석하는 기계가 히트를 치면서 해당 기계 이름으로 사명을 바꿨다. 그리고는 해당 분야에서는 국내 업계 1위, 나아가 해외 시장에서도 1위라며 자랑스럽게 홍보한다. 

 

 11번째 기업은 기업 소개에서도 그랬듯, 채용 공고도 나름 패기가 있다. 해외로 뻗어나가고 있다며, 자신들과 함께할 인재를 찾는단다. 해외영업 직무를 1순위로 설정한 그로서는, 11번째 기업이 꼭 알맞아 보인다. 그런데 채용공고에는 해외영업이라는 직무를 찾아볼 수 없다. 11번째 기업은, '해외시장전문가'라고 적어 놓았다. 어쨌든 해외영업이다. 아직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회사라 그런지, 영업과 마케팅을 겸한다고 적혀 있다. 영업과 마케팅을 겸하는, 11번째 기업과 함께 해외로 뻗어나가는 '해외시장전문가'를 뽑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작명이 약간 오글거렸지만, 자신도 전문가가 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갖고 11번째 기업에 지원한다.

 

 

 11번째 기업에 대한 첫인상은 좋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실수를 저지른다. 서류를 마구 난사하며 복사-붙여넣기에 익숙해진 탓인지, 그는 건성으로 확인하고는 최종 접수 버튼을 클릭했다. 어떤 일이든, 최종본을 송부하고 난 이후에야 자잘한 실수가 눈에 띄는 법이다. 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문제는 그 실수가 자잘한 정도가 아니다. 맨 마지막 문항, 어떻게 커갈 것인지 포부를 적어야 하는 항목에서 실수가 있었다. 그는 항상 이런 자기소개서 질문에, "향후 OO기업에 이바지하며 함께 커나가겠다~"는 식으로 진부하게 써놓은 자기소개서를 복사해서 붙여 넣었다. 이전 기업에 지원했던 것이니, 당연히 복사-붙여넣기 이후에 기업명을 바꿔주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이 중요한 과정을 깜빡한 채로, 이전 기업명 그대로 지원을 해버린 것이다. 그의 자기소개서에는 쌩판 관련 없는 다른 회사의 이름이 덩그러니 박혀 있다. 그것도, 해당 회사에 이바지하고 함께 크겠다고 대놓고 써놓은 채로 말이다.

 

 뒤늦게 발견하긴 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최종 제출된 이력서는 수정할 수가 없다. 그는 약간 아쉬움을 느끼긴 하나, 11번째 기업에 그리 목매는 상황은 아니므로 그냥 넘긴다. 혹시라도 운이 좋으면 서류 합격을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운이 좋았던 건지 무엇인지, 실제로 그는 11번째 회사로부터 서류 합격 메일을 받는다. 어리둥절하지만, 그는 애써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자잘한 실수가 있어도 넘어가 주는 통 큰 회사이겠거니, 어차피 다른 지원자들도 복사-붙여넣기 할 테니 이해해줬으려니, 조그마한 실수는 있지만 자기소개서 내용과 이력서 등을 봤을 때 해외시장전문가에 적합한 인재라고 생각되었으니 붙었을 것이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서류 전형 이후, 11번째 기업은 인적성 검사를 실시한다. 그가 잡X레닛 등에서 후기를 보니, 11번째 기업의 인적성 검사는 꽤나 어렵다고 한다. 대기업을 따라 형식적으로만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11번째 기업 특유의 문제 은행이 있다고 한다. 부채꼴의 넓이 구하기, 원의 넓이 구하기, 구의 부피 구하기, 원뿔의 부피 구하기 등이 지원자들을 당황케 했다고 한다.

 

 그는 귀찮긴 하지만, 이런 후기를 봐버린 이상 준비를 안 할 수가 없다. 부채꼴 넓이 공식, 원의 넓이 공식, 구의 부피 공식 등을 일일이 검색해서 외운다. 중학교였던가 고등학교였던가. 참으로 오랜만에 원주율 '파이'라는 것을 접한다. 나온다고 하니 외우고 있긴 하지만, 그는 외우면서도 조금씩 의구심이 든다. 도대체 뭘 하는 건가. 이걸 왜 해야 하는 건가. 이유는 하나다. 취업을 해서, 자신이 처한 한심한 상황, 취준생 딱지를 떼기 위해서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그저 외운다.

 

 

 원래 11번째 기업은, 어느 토요일에 서류 합격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인적성 검사를 실시하려 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점점 퍼지면서, 11번째 기업은 인적성 검사를 비대면으로 전환했다. 각자 집에서 노트북으로 시험을 보는 대신, 화상 통화 같은 방법으로 부정행위가 있는지 감독하는 것이다. 이런 비대면 방식은, 당연히도 대면 방식보다 통제하기가 힘들다. 그는 속으로, 11번째 기업이 자랑하는 인적성 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겠구나 생각한다.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면, 기업으로서는 해당 인적성 전형의 중요도를 떨어트릴 가능성이 크다. 시험이 조금 덜 어렵게 나오거나, 아니면 합격 커트라인이 꽤나 관대해지리라고 예상하는 그다.

 

 

 그의 이러한 잔머리는 꽤나 날카로운 것이었다. 인적성 당일, 수십 명의 지원자가 이메일로 안내받은 링크에 접속해서 시험을 치른다. 그는 11번째 기업 인적성 검사의 난이도가 꽤나 높다고 느낀다. 원기둥의 부피 등 준비했던 문제가 꽤 많이 나왔고, 그가 손대지 못한 수리 문제도 많다. 하지만 지원자들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바로 11번째 기업 인적성 검사 시스템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11번째 기업은 문제를 다 풀고 나서 반드시 '답안지 제출' 버튼을 클릭해야 답안이 제출되도록 설정해놓았다. 그런데 이에 더해, 시간이 다 되면 해당 부문을 강제 종료시키고 다음 부문으로 넘어가는 '시간제한'까지 설정해놓았다. 즉, 답안 제출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시간이 초과되면 이전까지 체크해 놓은 답안은 싹 날아가 빵점 처리가 되는 것이다. 취준생 대부분은 비대면 인적성 검사가 생소하며, 가뜩이나 11번째 기업의 시스템은 더욱 낯설다.   

 

 

 11번째 기업의 인적성 검사는 3가지 파트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각 파트마다 시간제한이 있다. 즉, 각 파트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답안지 제출을 눌러야 되는 것이다. 당연히도, 파트가 끝날 때마다 채팅창에 지원자들의 질문이 쇄도한다. 답안지 제출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다음 파트로 넘어가버린 지원자들의 애원이다.

 갑자기 컴퓨터 렉이 걸렸는데, 다음 파트로 넘어가버렸어요

 제출 버튼을 눌렀는데, 로딩하다가 그냥 시간이 끝나버렸는데 이건 어떻게 된 건가요

 제출 버튼을 못 눌렀는데, 0점 처리인가요

등등 다양하다.

 

 파트가 넘어갈 때마다 폭주하는 민원에 지쳤는지, 감독관 역할을 하던 담당 직원이 체념하듯 채팅창에 답을 보낸다.   

 답안지 제출을 누르지 못한 분들은 원칙적으로 0점 처리가 맞고, 시스템상 넘어가버렸으므로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다. 하지만, 처음 비대면으로 실시하는 것이고 혼란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으므로 어느 정도 감안하겠다. 답안지 제출을 못 누르셨더라도 계속 시험을 진행하시면 된다.  

 대강 이런 내용의 답변이다. 그는 속으로 옅은 웃음을 짓는다.

 

 

 11번째 기업 인적성 시험 마지막 파트는, 논술 형식이다. 다만, 영어 논술이다. 질문을 읽고, 해당 질문에 대한 본인의 답안을 영어로 작성하면 된다. 다른 파트는 문제가 너무 많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마지막 논술 문제 하나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가 받은 문제는 이렇다.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 어플 중 하나를 골라, 해당 어플에 대해 설명하고 추천해보시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스마트폰 이용 시간을 체크하고 통계를 보여주는 어플을 선택해서 영어로 설명하고 추천한다. 그는 핸드폰을 많이 보지 않고자, 눈 건강을 위하고자 설치했던 어플이 떠올라 별생각 없이 작성했던 것인데, 인체 분석 기계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11번째 기업 입장에서는 꽤나 알맞은 답변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나중에서야 든다.

 

 그가 시험을 잘 본 것인지, 답안지 제출 방식으로 인해 0점 처리된 지원자가 많아 그냥 모조리 통과시킨 것인지, 그는 11번째 기업 인적성 시험에 합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