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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

1차 면접 합격, 신체검사 (피뽑탈)

 29번째 기업은 대기업답게, 채용 절차가 오래 걸린다. 서류 발표, 면접 결과 발표 등 무언가를 발표하는데 1주일은 기본이다. 그는 핸드폰을 부여잡고, 이제나 저제나 29번째 기업 생각뿐이다. 마침내, 29번째 기업으로부터 면접 결과가 도착한다.

 

 1차 면접 합격

 

 합격이라는 글자를 보자, 그는 그럼 그렇지 하면서도 안도한다. 자신의 PT 답변이 썩 괜찮았고, 당시 면접관으로부터 대놓고 칭찬까지 들었다. 하지만, 면접 분위기와 내용이 어땠든 면접 결과는 예측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의 예측이 맞았다. 

 

 이름난 대기업에다가, 가고 싶은 산업군, 가고 싶은 직무로의 첫 관문을 뚫었다. 남은 것은, 최종 면접이라는 마지막 관문뿐이다. 그는 이미 최종 면접 탈락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최종 면접 탈락은, 1차 면접 탈락보다 충격이 크다. 그래서 그는, 최종 면접을 탈락할 때마다 다짐했다. 다음부터는, 최종 면접 기회가 주어져도 그 혼자 망상하고 설레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몇 번을 다짐했건만, 1차 면접 합격 메일을 받기가 무섭게 그는 한없이 설레기 시작한다.

 

 

 기업들은, 새로이 입사하는 직원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다. 눈은 잘 보이는지, 혈압은 어떤지, 키와 몸무게는 어떤지, 일하기에 적합한 신체인지를 체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체검사는, 기업에서 요구하는 것이니 당연히 기업 측이 비용을 부담한다. 일반적으로, 신체검사는 최종 면접 이후 합격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단계다.

 

 29번째 기업은, 홈페이지에 채용 프로세스를 도식화해두었다. 

서류 전형 - 1차 면접 - 2차 면접 - 신체검사 - 최종 입사

 원래대로라면 이렇다. 1차 면접 안내 당시에도, 향후의 채용 절차가 위와 같이 진행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29번째 기업은 1차 면접 합격 메일에서 갑작스레 절차를 바꾼다. 신체검사를, 최종 면접 이후가 아닌 최종 면접 이전에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29번째 기업 채용을 준비하는 단톡방에 익명으로 참여해 있다. 1차 면접 탈락자들이 대거 나갔음에도, 단톡방에는 아직도 수 백명의 인원들이 남아있다. 최종면접 이전에 신체검사를 실시한다는 안내에, 단톡방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하긴, 그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류의 익명 단톡방은 그럴 필요가 없는 정보에도 굳이 크게 술렁이는 경향이 있다. 29번째 기업의 바뀐 프로세스에 대해, 익명의 취업준비생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1) 29번째 기업이, 신입사원을 대거 채용하는가 보다. 신체검사를 시킨다는 것은 최종 합격이나 다를 바 없다. 사실상 1차 면접 합격이 최종 합격이다.

2) 최종 합격이 보장된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피만 뺏기는 거다. 신체검사할 때 피를 많이 뽑는다. 피만 뽑히고 나서 탈락하는, 그야말로 '피뽑탈'이 될 것이다.

 

 

 누구보다도 1차 면접을 잘 봤다고 자신하는 그는, 29번째 기업에 대한 충성심과 기대가 한없이 높아진 상태다. 그는 당연히 1번 부류의, 긍정적인 전망으로 생각한다. 굳이 비용을 지원해줘 가며까지 이 많은 인원의 신체검사를 진행하다니, 대부분 채용할 예정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익명의 단톡방은 언제나 시끄럽고 언제나 악당이 있다. 2번 생각을 고수하는 몇몇 이들이, 왜 굳이 지금 신체검사를 하고 피를 뽑혀야 하냐며 '피뽑탈'을 주문처럼 왼다. 

 피뽑탈 피뽑탈, 이러고 나서 피뽑탈한다. 내가 예전에도 피뽑탈 당해봤다. 기분 더럽다. 또 피뽑탈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 피뽑탈이다.

 

 그는 이러한 행보가 상당히 아니꼽다.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간절한 이들에게, 굳이 이런 식으로 초를 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저 익명의 참여자가 이전에 피뽑탈을 당한 이유는 그 인성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더불어, 저 참여자는 이번에도 '피뽑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9번째 기업의 신체검사는, 정해진 병원에서 정해진 기한까지 실시해야 한다. 그는 최대한 빨리 병원에 찾아가 검사를 실시한다. 검사는 시력, 청력, 흉부 X-ray, 소변, 혈압, 채혈(피검사) 등이다. 이러한 검사는 커다란 병원에서 실시한다. 큰 병원을 갈 일이 없는 그는, 큰 병원의 내부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복잡하다고 느낀다. 검진을 받으러 온 환자들은, 간호사들의 부름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다. 시력 검사를 해야 하니 여기 앉아계셔라, 시력 검사가 끝났으니 저 쪽으로 가셔라, 어디서 오셨냐 시력 검사 끝났냐, 그럼 여기 앉아 계셔라, 일로 오셔라 청력 검사하셔야 한다, 이제 저기 앉아서 기다리시면 혈압 재실 거다 등이다. 이 수많은 사람들을 처리하며 이리저리 컨트롤하는 간호사들이 대단해 보인다.

 

 간호사들의 안내에 따라 휩쓸려 가기 위해, 그는 머리를 비운다. 가라는 곳으로 가고, 기다리라면 기다린다. 머리는 비우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들을 수 있도록 귀만 깨워둔다.

 

 시력, 청력, X-ray 등이 끝난다. 그는 혈압을 재려 대기 중이다. 그와 혈압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다. 병원에서 혈압을 잴 때마다, 의료 관계자들은 그의 혈압이 높다고 했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운동도 꾸준히 하는 편이고, 일상생활에서 어떤 불편함도 없다. 하지만 의료 관계자들은, 그의 혈압 숫자만을 보고는 항상 걱정과 경고를 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혈압을 잴 때마다 긴장했으며 긴장으로 인해 혈압이 더 높게 나왔다.

 

 그는, 과거의 어떤 때보다도 더 긴장한 상태다. 지금의 신체검사는, 다른 목적이 아닌 기업 제출용이다. 29번째 기업이, 그의 신체를 판단하는 근거 자료다. 만일 혈압이 너무 높게 나와버리면, 29번째 기업은 그의 '혈압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려 할 수 있다. 부디 낮게 나와야 할 텐데, 그는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척 하지만 그의 혈액순환은 더 빨라지는 듯하다.

 

 

 그의 차례가 되어, 그는 자리에 앉는다. 혈압을 잰다. 150/90 정도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혈압 정상 범위는 120/80 이란다. 그는 혈압을 잴 때마다, 120/80이라는 숫자를 본 기억이 없다. 

 

 150/90이라는 숫자를 보더니, 간호사가 흠칫 놀란다. 언제나처럼, 역시나다. 간호사는, 혈압이 너무 높다며, 다시 재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짜증이 난다. 다시 재면, 긴장해서 더 높게 나올 수도 있다. 어차피 기업 제출용 신체검사이니, 적당히 130대로 적어서 써주면 안 되나 생각한다. 간호사는 그에게 뒤쪽으로 돌아가서 긴장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있다가, 호명하면 다시 오라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도 긴장하지 않고 편안한 상태였다. 혈압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오히려 그의 평화를 방해하기 시작한다.

 

 언제나처럼, 그는 혈압 재검사를 위해 기다린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간호사가 다시 그의 이름을 호명한다. 그는 10분 전보다 더 진정이 되었는가. 잘 모르겠다. 혈압 재는 기계에 팔을 넣으며, 결과를 기다리며, 그는 오히려 더 긴장된다. 혈압계에 의해 꽉 조인 팔에서, 두근두근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두 번째 결과가 나온다. 140/90이다. 그는, 그나마 160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두 번째 잴 때 오히려 더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간호사의 표정을 엿보니, 간호사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다. 한번 더 재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다. 그는 참지 못하고 묻는다.

 

  그 : 이 정도면, 크게 문제가 되나요?

  간호사 : 음... 아무래도, 정상 수치보다는 높게 나오니까요.

  그 : 기업 제출용 신체검사인데, 140/90이면 채용 때 문제가 될 수도 있나요?

  간호사 : 그 부분은 답변드리기가 애매해요. 기업에서 판단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뭐...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요. 다음 채혈 검사받으러 가시면 됩니다.

 

 

 간신히 통과했으나 그는 뒷맛이 씁쓸하다. 이번에는 채혈이다. 그를 호명한 간호사 앞자리에 앉는다. 간호사는 그의 오른팔 윗부분에 고무줄을 묶은 뒤, 팔이 접히는 부분에 주삿바늘을 꼽아 넣는다. 주삿바늘이 신체 내부로 침입한 순간부터, 그의 오른팔에는 따갑고 뿌듯한 통증이 지속된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이물질이 침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경보마냥 통증이 울린다. 간호사는 그의 피를 한 통인지 두 통인지 뽑고 난 뒤 주삿바늘을 뺀다. 오른팔 전체에 울리던 경보는 바로 꺼지지만, 바늘이 꼽혔던 부분에는 이물감이 남아있다.

 

 

 오랜만의 바깥 구경, 병원 구경, 신체검사다. 최종 면접을 합격한 뒤 실시하는 신체검사였더라면 기분이 훨씬 나았을 테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다. 그는 자신이 29번째 기업에 합격할 것이리라고 꽤나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간호사가 가져가는 피를 보며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오른다.

 

피뽑탈

 

 설마, 아닐 것이다. 설마 탈락하진 않겠지. 1차 면접도 나쁘지 않게 봤는데, 2차 면접 때도 더 열심히 준비하면 충분히 붙을 수 있을 것이다. 피뽑탈이라니, 별의 별 것들을 다 줄인다고 생각하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