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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17 - 주말 시장(1)

 그가 스시 샵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전화가 울린다. 그가 이전에 돌렸던 이력서 중 하나가 뒤늦게 제 역할을 했다. 전화 속 목소리는 여자다. 자신의 이름은 낀(KIN)이라고 소개한다. 낀은 그에게 아직 구직 중이냐며, 토요일 아침 8시까지 Nunda station 앞 시장으로 오라고 한다. 그의 두 번째 트라이얼이다. 그는 이번에도, 통화한 내용을 문자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토요일, 그는 자전거를 타고 Nunda 역으로 간다. 아침 8시라니, 생각보다 시간이 이르다. Nunda 역 앞은 주말 임시 시장이 개설되고 있다. 그가 걸어가는 길 양 옆으로, 임시 상점을 설치하는 사람들이 분주하다. 그중 한 임시 상점에 낀과 그녀의 동료가 있었다. 그는 들어가 인사한다. 낀은 그에게, 일단 바쁘니 상점 설치부터 도와달라고 말하며 노란 앞치마와 모자를 준다. 오늘 트라이얼은 톰의 트라이얼과는 사뭇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는 일단 낀이 시키는 대로 임시 상점을 설치했다. 압축가스 탱크를 버너에 연결하고, 임시 테이블들을 편 뒤 테이블보를 깔았다. 얼추 상점의 형태가 완성되어갈 무렵, 시장을 구경하던 이들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낀이 준비를 마치자, 주문이 쇄도한다. 그제야 그는 깨닫는다. 낀의 임시 상점은 브런치를 만들어 파는 상점이었다. 무엇을 해야할지 우왕좌왕하고 있는 그에게, 낀은 카운터를 시킨다. 

 

낀의 브런치 상점이 돌아가는 구조는 이렇다. 

1) 손님이 카운터에서 주문과 함께 돈을 지불한다.

2) 뒤에서 이를 듣고 즉시 조리를 시작한다. (바쁠 때는 들을 수가 없다. 카운터에서 이야기해줘야 한다) 

3) 완성되면, 카운터에서 손님의 이름을 외친다. 손님이 오면 음식을 받아가게끔 한다.

 

 메뉴는 9가지다. 디럭스 머핀, 베이컨 엔 에그, 빅 브렉퍼스트 등이다. 모든 메뉴의 기본 골자는 같다. 빵을 구워서, 그 위에 베이컨이나 계란 후라이 등 토핑을 올리는 식이다. 다만, '3 종류의 빵 중 어떤 빵을 쓸 것이냐 / 올라가는 토핑이 무엇이냐' 만이 다를 뿐이다. 빵 위에 올라가는 토핑은 베이컨, 계란, 시금치 볶음, 버섯, 으깬 아보카도, 치즈, 해쉬브라운, 구운 토마토 이렇게 8 종류다. 8개의 토핑을, 어떤 순서와 조합으로 올리느냐만 잘 외우면 된다. 가격은 가장 싼 것이 8불, 가장 비싼 빅 브렉퍼스트가 15불이다. 빅 브렉퍼스트는, 가장 큰 빵에 토핑을 모조리 담아 주면 된다.

 

 임시 상점이다 보니, 메뉴판 자체가 없다. 메뉴판이라고는 바깥에 붙어있는 포스터가 전부여서, 손님들은 볼 수 있지만 안쪽 직원의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당연히 아직 메뉴를 외우지 못한다. 낀은 박스를 찢어서 주며, 당장 앞에 나가 메뉴를 적어와서 보면서 일하라고 한다. 그는 재빨리 나가서 메뉴판을 보며 이름, 재료, 가격을 적는다. 처음에는 영어로 적었으나, 영어로 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한글도 같이 적는다. 햇볕이 내리쬐는 주말 시장, 그가 메뉴를 적는 동안에도 손님은 계속 늘어난다.

 

 손님들의 줄은 늘어나다 못해 바글바글하다. 그는 손님의 이름과 메뉴를 받아 적고, 돈을 받아 계산한다. 그가 오늘 처음 만져보는 화폐나 동전도 있다. 그의 일은, 주문을 받고 끝이 아니다. 주문받은 메뉴의 빵을 잘라 토스트기에 넣고, 부족한 토핑도 보충해야 한다. 임시 상점이니, 업무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자신의 일이 아닌 것은 없다. 덜 바쁜 사람이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해놓아야 한다. 한 명이라도 놀기 시작하면, 그 부담은 다른 동료들에게 옮겨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손님이 너무 몰리자, 낀과 다른 동료는 수량 파악을 포기한다.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를 그릴 가득히 깔아버리고 계속 굽는다. 그는 애초에 수량 파악을 포기했다. 낀은 그가 잘못 집어넣은 빵을 빼놓았다가, 필요한 메뉴를 만들 때 활용한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손과 일머리는 느린 편이 아니었다. 아수라장 속에서도, 그의 능률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한다. 가끔씩 그는, 오래 기다리는 손님의 이름을 부르며 잠시만 더 기다려달라 말하는 센스도 보인다. 그런 그에게 낀은 '굿 잡'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입에 유난히 붙지 않는 메뉴가 있었다. 바로 Avo & Fetta(아보 앤 페타)다. 빵 위에 으깬 아보카도를 듬뿍 바르고, 두부 같은 페타 치즈를 올리는 메뉴인데, 이 페타 치즈가 이상하게도 그의 입에 잘 붙지 않는다. 그는 이 메뉴를 계속 '아보 앤 페티' 라고 발음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자, 결국 참다못한 낀이 그의 등짝을 때리며 페타라고 외친다. 신기하게도 등짝을 맞은 이후 그는 페타 치즈를 절대 틀리지 않는다.

 

 그는 등짝을 맞으며, 오히려 웃음이 났다. 낀의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로 보였으므로, 어머니 손맛과 비슷한 느낌이다. 얼마만의 어머니 손맛인가. 그렇게 아수라장이 된 임시 상점 속에서 일하며, 어느덧 4시가 된다. 시장이 파하면서, 임시 상점들도 모두 철거를 시작한다. 그는 철거를 끝내고 녹초가 된다. 다른 태국인 동료가 그를 보며 웃는다. 오늘은 그의 트라이얼이라 3명이 함께한 것이고, 원래는 2명이서 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는 대답할 기력도, 놀랄 기력도 없다.

 낀은 그에게, 오늘 처음인데도 굉장히 잘했다고 칭찬하며 돈을 지급한다. 100여 불이다. 그는 트라이얼에서 돈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차에, 100불이라는 큰 돈에 감격한다. 낀은 그에게 내일도 일하라고 말한다. 그는 낀의 오지잡(?)-캐쉬잡-파트타임에 고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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