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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182 - 번호판 반납

 그는 캠리 폐차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서둘러 진행한다. 당시에는 자신이 왜 이리 서두르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빨리 끝내버리고 후련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후련함도 후련함이지만,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부분도 없지 않았던 듯싶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정이 들고 나서 이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질질 끄는 것보다는,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모든 절차를 끝내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다.

 

 

 그에게는 아직 캠리의 번호판이 남아 있다. 이 번호판을 교통국에 반납하고, 남은 등록 기간에 대한 금액을 환불받을 수 있다. 호주에서는 자동차 보유세가 없는 대신 등록비(Registration, Rego)를 낸다. Registration은 6개월(약 300불), 1년 단위(약 700~800불)다. 그는 캠리를 폐차했지만, 캠리의 등록 기간은 아직 남아 있다. 남은 등록 기간은 약 3개월 정도다.

 

 그는 Rego 환불 방법을 찾아본다. Rego를 환불하기 위해서는 각종 서류와 번호판이 필요하다. 폐차장 직원이 그에게 미리 번호판을 떼어놓으라고 일러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번호판이 없어도 등록비 환불이 가능하긴 하나, 번호판 분실에 대한 분실료를 내야 한다. 그는 번호판을 기념으로 남기고 싶었으나, 분실료를 낸다는 점이 내키지 않는다. 이번에도 현실이, 그의 낭만적인 상상을 압도한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는 번호판을 모조리 반납해서 최대한 많은 금액을 환불받기로 한다.

 

 

 교통국 홈페이지에 가서, Rego 환불 관련 안내를 찾는다. 이런저런 서류와 번호판을 가지고 가까운 교통국을 방문하라는 내용이다. 그는 혹시나 헛걸음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철저히 준비한다. 또한 민원인들이 많고 느릿느릿 처리하는 공무원이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방문해서 기다리고자 한다.

 

 그는 구글 맵을 키고, 교통국을 검색한다. 교통국은 외곽에도 지점이 있지만, 그의 숙소에서는 버스를 타고 내려서 조금 걸어야 하는 거리다. 캠리를 폐차하고 처음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때는 너무나도 어색했는데, 몇 번 해보니 다시 익숙해진다. 대중교통이 익숙해진 만큼, 캠리의 기억은 아득해진다. 매일 차를 타고 다녔던 때가 엊그제인데, 먼 옛날 아련한 추억처럼 느껴진다.

 

 

 교통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한다. 첫 번째 버스에서 내린 뒤, 두 번째 버스를 기다린다. 뒤로는 강아지풀 같은 풀들이 펼쳐진 풀밭이고, 하늘은 푸르고, 도로는 2차선으로 좁다. 외곽이라 건물은 거의 없으며 풀밭의 나무들로 시야가 좁다. 눈을 들면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 저 앞의 조그만 다리와 다리 밑 굴다리로 가끔 지나는 차들 뿐이다.

 

 구글 맵을 보니, 두 번째 버스는 배차 간격이 길다. 그는 금속 번호판이 들어 있어 묵직한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캠리가 없어 쓸쓸하긴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다. 그는 호주에서 다시 차량을 살 생각이 없다. 브리즈번에서는 자전거를 타다가 캠리를 샀고, 멜버른까지 캠리로 온 뒤 이제는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는 차가 없어져 불편하다기보다는, 느긋하고 여유로워졌다는 느낌이 크다. 

 

 

 두 번째 버스를 타고 내린 뒤, 그는 조금 걷는다. 약 10분을 걷자, 도로밖에 없는 평야의 동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교통국이 있다. 공공 기관이라 그런지, 주변 풍경과는 달리 건물과 주차장이 깔끔하고 반짝인다. 시골 풍경 속에, 교통국이 가장 최신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에어컨이 시원하고 사람들이 꽤 많다.

 

 번호표 기계를 찾는 그에게, 직원이 다가와 어떤 종류의 민원인지 묻는다. 그가 Rego 환불이라고 답하니, 번호표를 뽑아 그에게 준다. 그는 민원 창구들 앞 긴 나무의자에 앉아 기다린다. 바닥은 카펫이고,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꽤 한산하다. 긴 나무의자 곳곳이 비어 있다. 그는 호주 공공기관의 일 처리가 느리다는 편견을 갖고 있어서, 먼 거리를 왔는데 오늘 안에 해결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한다. 그의 걱정은 헛된 것이었다. 15분 정도 지나자, 민원 창구에 그의 번호가 뜬다. 그가 다가가자, 신분증 및 서류와 번호판을 달라고 한다. 그는 속으로, 번호판을 소장하게끔 해달라고 물어볼까 했으나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절차 속에 자신도 모르게 번호판을 넘겨주고 만다. 

 

 그의 Rego(차량 등록)는 브리즈번에서 받았다. 즉, 그의 번호판은 Queensland 주의 번호판이다. 호주는 주마다 번호판이 다르다. 이곳은 멜버른 외곽이므로, Victoria 주다. 그의 번호판을 환불받기 위해서는, 번호판을 Queensland로 보내서 그곳에서 환불을 받은 뒤, 돈을 다시 그에게로 보내야 한다. 환불받은 돈은 수표로 지급된다고 한다. 차를 폐차하면서, 평생 보지 못했던 수표를 두 번이나 보는 그다. 창구 직원은 그에게, 수표가 우편으로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며 수령 주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일하는 철판요리 레스토랑 주소를 적는다.

 

 

 번호판 환불 절차가 끝났다. 그는 차량 등록을 할 때, 등록을 환불할 때 모두 교통국을 방문했다. 호주의 관공서는 전산화가 덜 되어 있고 일 처리가 느리다는 말을 많이 봤지만, 그가 경험한 교통국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차량 등록과 환불 모두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수표나 서류를 몇 주 뒤 우편으로 받는 등 약간의 번거로움은 있지만, 도저히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호주도 한국처럼 사람이 사는 곳이다. 한국처럼 빠르고 최첨단 전산 시스템은 아니더라도, 호주의 관공서 시스템도 나름 체계를 갖추고 잘 돌아가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는 오히려 부모님에게만 맡기고 은행이나 관공서 등은 거의 가보지 않았다. 낯선 호주에서 벌벌 떨며 처음 은행을 방문했던 것을 시작으로, 관공서와 조금씩 친근해지는 그다.

 

 

 그는 미리 레스토랑 사장들에게 이야기해서, 차량 등록세 환불 수표 수령을 위해 우편 주소를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몇 주 뒤, 여사장이 그에게 온 메일이 있다며 봉투를 건넨다. 봉투에는 Queensland 주의 문양이 찍혀 있다. 뜯어보니 차량 등록세 환불 수표다. 300불이 넘는 금액이다. 폐차장 직원은 수표에 금액을 펜으로 대충 휘갈겨 썼다면, 퀸즐랜드가 보내온 수표는 프린터로 숫자가 깔끔하게 인쇄되어 있다. 캠리를 폐차장에 처분하면서, 등록세를 환불하면서 약 700불에 가까운 돈을 손에 쥔다. 그는 이 돈이, 떠나는 캠리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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