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을 견인하고 이튿날 아침부터 그는 분주하다. 우선 남사장과 데이빗에게 문자를 넣는다. 차를 폐차할 예정이며, 건설현장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문자다. 건설현장은 그의 숙소에서 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다. 개인 주택들이 많은 동네인데 지하철역이 없다. 외곽 지역이라 버스도 많이 다니지 않아 출퇴근이 불편하다. 남사장은 그에게, 웨이터 일은 할 수 있냐고 묻는다. 그가 검색해보니, 레스토랑이 위치한 프랭스턴은 그래도 규모가 있는 곳이라 지하철과 버스가 많이 다닌다. 웨이터 일은 할 수 있다고 답한다.
폐차하기로 결심했으니, 실행만 하면 된다. 그는 다시 웨이터 일을 가야 하는 월요일 전, 그러니까 당일(금요일)과 주말 동안 최대한 빨리 폐차를 끝내버리고 싶다. 하지만 호주의 폐차장 및 상업시설들은 주말에는 운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웨이터 일을 시작하기 전 폐차할 수 있는 때는 당장 오늘, 금요일뿐이다. 아니면 다음 주까지 캠리를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캠리가 짐처럼 느껴진다.
우선 캠리에서 짐을 모조리 뺀다. 뒷자리 바닥에 자리 잡고 있던 공구 벨트와 작업화, 안전모,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수건과 후리스 등 잡다한 살림들이다. 잡다한 살림을 전부 방으로 옮기고 나니, 캠리 내부가 깔끔해진다. 이제 캠리를 폐차해야 한다. 그가 찾아보니, 호주에서 폐차장은 Wrecker라고 부른다. 구글 맵에서 Car Wrecker를 검색한다. 그의 집은 외곽이고, 폐차장은 주로 도심보다는 외곽에 위치한다. 그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폐차장이 여럿 있다. 그는 지도에 표시된 폐차장 중 한 곳에 전화를 건다.
전화 연결이 되고, 그는 차를 폐차하고 싶다고 말한다. 전화 속 목소리가, 차종과 연식을 묻는다. 그가 2011년형 캠리라고 말한다. 폐차 이유 등을 묻고 답한다. 전화 속 목소리는 잠시 후, 그의 캠리에 350불의 가격을 쳐주겠다고 말한다. 그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말에 놀란다. 캠리의 결함이 너무 심각해서, 그는 오히려 자신이 돈을 주고 폐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하지만 폐차장에서는 고철값인지, 돈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는 캠리를 되팔 생각을 접으면서, 아예 기대를 접었던 상태다.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오히려 폐차에 돈이 들 것이라 생각했던 그에게 350불은 가뭄의 단비 같은 말이다. 그의 영악한 성향이 발현되어, 그는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는 구글 맵에 표시되어 있는 폐차장에 모조리 전화를 돌린다. 차량 모델, 연식, 폐차 이유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면 폐차장에서 가격을 제시한다. 대부분의 폐차장이 300불 언저리, 가장 박하게 쳐준 곳이 250불이다. 전화를 돌리다 보니, 맨 처음 전화했던 곳이 그나마 가장 가격을 후하게 쳐줬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그는 혹시나 500불 넘게 받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500불은 커녕 400불도 넘어가지 못한다. 결국 맨 처음 전화했던 곳으로 다시 전화한다.
더 값을 후하게 쳐주는 다른 곳을 찾는 대신, 그는 이 폐차장과 협상을 하기로 한다. 그는 전화기 속 목소리에게, 값을 조금 더 쳐줄 수 있냐고 묻는다. 전화기 속 목소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380불까지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만일 그의 캠리 바퀴가 강철 휠이라면, 50불을 더 쳐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캠리 바퀴가 강철 휠인지 무엇인지 모른다. 어쨌든 380불이면, 400불에는 못 미치지만 다른 어느 폐차장보다 낫다. 거래가 성사된다.
언제쯤 캠리를 가져갈 것이냐고 물으니, 전화기 속 목소리는 오늘 당장 가지러 가겠다고 말한다. 생각보다 이르긴 하지만, 차라리 잘 됐다. 폐차하기로 생각한 김에, 굳이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빨리 처리해버리는 것이 낫다. 전화기 속 목소리는, 번호판을 떼어놓으라고 말한다. 이유를 물으니, 번호판은 그가 나중에 교통국에 반납하면서 남은 기간만큼의 등록 비용을 환불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또한 그가 예상하지 못한 수입이다. 그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는다. 밖으로 나가 번호판을 떼어낸다. 처음 차를 구매해서 페르시아 주인과 함께 번호판을 달던 때처럼, 번호판을 떼어낼 때도 여러 감정을 느낀다.
약 1시간 뒤, 트럭이 그와 캠리 앞에 도착한다. 전날 밤의 트럭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커다란 트럭이다. 트럭에서 내린 운전사는, 흰머리의 중장년으로 보이며 백인인지 라틴계인지 헷갈린다. 검은 벙거지 모자 같은 것과 동그란 안경을 쓰고, 위아래 옷은 작업복인지 무엇인지 검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정리되지 않은 수염에 피부가 푸석푸석하다. 외관도 외관이지만, 걷는 모양새나 말투가 불량해 보인다. 움직일 때 느껴지는 부피감으로 보아 마른 몸인 듯한데, 위아래의 검은 옷은 품이 넓고 팔랑거려서 조화롭지 않다. 그는 왠지 이 운전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운전사는 그와 통화했던 목소리의 인물이 아니다. 전화 속 목소리는 친절했는데, 이 운전사는 무뚝뚝하다. 인사만 형식적으로 나눈 뒤, 그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듯하다. 말 그대로, 캠리를 데려가는 것에만 관심 있는 저승사자 같다.
그는 운전사의 태도에 살짝 기분이 상한다. 운전사는 그와는 말도 하지 않고 캠리를 이리저리 살핀다. 1분도 체 안되게 보더니, 수표에 펜으로 휘갈기며 금액을 적는다. 388불이다. 그가 바퀴가 강철이 아니냐고 물으니, 운전사는 퉁명스럽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운전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내쫓고 다른 폐차장을 이용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눈앞의 수표, 그리고 캠리를 어서 처리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는 말없이 수표를 받는다. 캠리를 떠나보내야하는 아쉬움, 저승사자같은 운전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생에 처음 만져보는 수표가 신기하다.
운전사는 그가 수표를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캠리를 수거하기 시작한다. 운전사는 차가우리만치, 오로지 맡겨진 일만 한다. 그에게서 키를 받아 곧바로 캠리를 쇠사슬에 묶어, 트럭 위로 싣는다. 캠리를 함부로 다루는 것 같은 손길에, 그는 해당 운전사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운전사처럼, 운전사가 끌고 온 트럭도 전반적으로 검다. 캠리는 순식간에 트럭 위로 올라간다. 그가 수표를 받아 든 순간, 이미 운전사와의 거래는 끝났다. 운전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캠리를 실어 가버린다. 그는 캠리와의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에 어안이 벙벙하다.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서, 떠나는 캠리와 트럭을 연거푸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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