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차 1주일 정도 뒤, 남사장이 그에게 제안을 한다. 자신의 딸이 가진 오래된 차량이 있는데, 그가 원한다면 싼값에 주겠다는 말이다. 차량이 다시 생기면, 건설현장 일도 다시 할 수 있게 되니 일석이조 아니냐는 제안이다. 남사장은 그에게 차도 팔고, 노동력도 제공받을 계산이다. 하지만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비자 때문에, 다시 차량을 살 생각이 없다. 그에게 호주에서의 차량은 캠리 한 대로 족하다. 남사장이 꽤 저렴한 가격을 제시했지만, 그는 거절한다. 그가 차량을 거절한 데에는, 폐차 후 알게 된 대중교통의 묘미도 한몫한다.
폐차 후 그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멜버른 중심과 주변부는 트램이 많다. 하지만 그가 사는 동네처럼 먼 외곽 지역에는 트램이 전무하다. 트램이 없으니 그는 버스와 기차를 이용한다. 외곽 지역이므로, 그는 대중교통으로 통근하면서 만석인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자리는 항상 여유롭다.
기차역은 걸어서 약 30분 거리다. 6차선 정도의 넓은 도로를 지나, 펜스를 우회해서 높은 지대 위로 올라가야 나레 워른 역이 나온다. 반면 버스 정류장은 그의 숙소에서 가깝다. 그가 캠리를 몰고 주택가에서 도로로 합류했던 바로 그 지점에 정류장이 있다. 문제는 버스의 배차 간격이 길다는 점이다. 역까지 거리가 먼 기차와, 배차 간격이 긴 버스 중 그는 버스를 선택한다. 풍경이 재밌고, 정류장이 가까우니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춰 숙소에서 나가면 된다. 버스든 기차든, 레스토랑이 위치한 프랭스턴까지는 1시간이 넘게 소요된다. 그는 일을 시작하기 2시간 전부터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나간다.
숙소에서 프랭스턴까지 직행 버스가 없어서, 중간에 사람이 많은 지점에서 환승한다. 환승하는 곳은 조그만 터미널 같은 곳으로, 그가 환승하는 시간에는 항상 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반대편 버스를 타러 줄을 서 있다. 초중학생으로 보이는데, 모두 유니폼을 입었다. 남자는 바지와 와이셔츠에 넥타이, 여자는 치마와 와이셔츠에 넥타이다. 남녀 모두 하의는 진청색, 와이셔츠는 하얀색에 줄무늬가 진청색, 넥타이는 빨간색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세일러문 느낌의 교복이다.
그는 출근길 버스에서 마음이 편안하다. 탁 트인 평원 위로 황금빛 노을이 펼쳐진다. 캠리를 운전하면서 봤던 황금빛 노을을 버스에 앉아서 본다. 같은 노을이지만 느낌이 다르다. 캠리는 주로 고속도로로 달렸지만, 버스는 외곽의 마을 구석구석을 돈다. 캠리를 운전할 때는 넓게 뻥 뚫린 황금빛 평야를 봤다면, 버스에서는 황금빛 노을에 물든 집들과 사람들을 본다.
캠리는 그가 자유로이 운전하며 창문을 열고 달렸다. 대중교통은 그런 자유로움은 없지만, 운전에 신경 쓰지 않아서 좋다. 그저 창밖 노을만 바라보다가, 도착하면 부담 없이 내리면 된다. 캠리로는 목적지 바로 앞까지 운전했다. 대중교통은 정류장과 역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귀찮고 번거롭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 풍경들을 접하게 된다. 억지로라도 정류장과 기차역을 향해 걸어가면서, 캠리를 타면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프랭스턴의 주변 모습을 본다. 황금빛 노을을 더 오래, 천천히 즐기게 된 그다.
그가 출근길에 두 번째 버스로 환승했을 때, 소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이 날따라 유독 식료품점에서 장을 본 가족들이 많이 탔다. 인도인이나 중동인 가족이 많고, 버스 기사도 인도인 아니면 중동인이었다. 그런데 출발할 즈음, 맨 뒷자리에 타 있던 승객이 음악을 크게 틀어버린다. 개인주의가 강한 호주의 특성인 셈 치고 넘어가려 했으나, 음악 소리가 전혀 줄지 않는다. 계속되는 음악소리에, 둔한 그의 신경까지 거슬리기 시작한다. 아랍계 여성들 특유의 커다란 눈이 뒷좌석을 향하지만 당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당사자는 금발의 백인으로, 썬글라스를 끼고 팔다리에 한껏 문신을 새겼다. 호주에서 문신은 흔한 것이지만, 이 백인은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행동과 표정으로 인해 불량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결국 승객 중 누군가가 버스 기사에게 말한 모양이다. 출발하던 버스가 중간에 멈추더니, 버스 기사가 뒤로 와서 음악을 꺼달라고 한다. 백인은 따르지 않는다. 자신이 왜 그래야 하냐며, 어서 출발하라고 한다.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로, 버스 기사의 말도 안 되는 요구 때문에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고 한다. 버스 기사는 다른 승객의 요청이 있었다며, 음악을 꺼달라고 말한다. 백인은 승객들을 향해서 자신의 음악이 시끄럽냐고 소리친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다들 괜찮다고 하는 것 아니냐 말한다.
실랑이가 길어지면서, 기다리던 승객들에게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누구를 향한 불만인지 부정확하다. 별 것 아닌 일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출발하자는 것인지, 피해 끼치지 말고 어서 음악을 끄라는 것인지 헷갈린다.
갑자기, 음악 재생 백인 옆에 앉아있던 다른 백인이 가세한다.(너무 자연스러워서 일행인 줄 알았다) 두 백인은 버스 기사에게 소리치며 몰아세운다. 버스 기사 때문에 시간이 지연되고 있다며, 여기 승객들 표정을 좀 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백인들 편을 들어야 할지, 버스 기사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한쪽이든 양보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을 끄던지, 그냥 출발하면 될 터다. 그는 시계를 본다. 실랑이에만 20분 가까이 소요되면서, 그의 레스토랑 도착 시간이 촉박하다. 시계를 본 후 그는 백인들 쪽으로 기운다. 저들이 아니꼽긴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출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기사는 안전유리로 보호되어 있는 운전석에 앉아 문을 잠그고, 경찰에 전화한다. 그리고 경찰이 올 때까지 대기한다. 승객들의 불만스러운 소리는 더욱 커진다. 두 백인은 운전석을 두드리며 욕하다가, 경찰이 와도 전혀 무서울 것 없다며 버틴다. 기사는 아예 시동을 꺼버린다. 두 백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서성거리다가 담배를 피우러 버스 밖으로 나간다. 그때, 기사가 시동을 걸고 버스 문을 닫아버린다. 두 백인은 당황해서 문을 두드리고, 승객들은 환호한다. 정의구현에 대한 시원함인지, 드디어 버스가 출발할 것이라는 기대감인지 애매하다.
기사는 출발하지 않는다. 승객들은 서로 눈치만 볼뿐 말이 없다. 조금 있으니 경찰 두 명이 도착한다. 제복 위에 두터운 조끼를 입고, 썬글라스를 꼈다. 경찰이 도착하고 나서야, 기사는 운전석에서 나온다. 기사와 백인들이 서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경찰은 상황 판단을 마친 듯하다. 두 백인이 억울하다는 듯이 법석을 떨었으나, 두 경찰은 여느 호주 경찰들처럼 온화하면서도 강력하다. 경찰들은 백인들에게, 지금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하러 왔는데 너네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문제가 커질 것이라며 선을 확실히 긋는다. 경찰들의 말에, 두 백인은 금세 얌전해진다.
두 백인은 경찰들과 남고, 버스는 출발한다. 승객들은 안도하기도 하고 환호하기도 한다. 그는 조급함에 백인들 편으로 기울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기사가 만일 두 백인에게 기가 눌려 그냥 출발했더라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출발만 지연시킨 멍청이로 비웃음을 살 뻔했다. 그를 포함한 승객들의 분위기는 결코 기사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스 기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실행했다. 화 한번 내지 않고, 두 백인의 비웃음을 무표정으로 받아내며 경찰을 기다린 버스 기사가 멋있게 느껴진다. 동시에, 경찰과 함께 남아있을 두 백인이 고소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틀어 말썽을 일으킨 백인보다 오히려, 굳이 옆에서 거들다가 같이 경찰 앞에 서게 된 백인은 도무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궁금하다.
'회상 > 호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5 - 대중교통 여행 (0) | 2021.09.27 |
---|---|
184 - 대중교통 퇴근 (0) | 2021.09.27 |
182 - 번호판 반납 (0) | 2021.09.24 |
181 - 오디오 선물 (0) | 2021.09.24 |
180 - Wrecker (0) | 2021.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