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없으니 건설현장 일은 나갈 수 없다. 그는 웨이터 일만 한다. 가족들이 떠난 여파가 아직 남아, 그는 이따금씩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그래서 조금 무기력하지만, 저녁에 웨이터 일만 하면서 지낸다. 대중교통으로 레스토랑까지는 꽤 걸리지만, 달리 할 일이 없으니 상관없다. 몇 시간 더 일찍 나가고 몇 시간 더 늦게 들어오면 된다. 그는 약 네다섯 시간 웨이터 일을 하기 위해, 대중교통에서 왕복 4시간을 보낸다. 무기력하면서도, 창밖을 보며 노을과 경치를 구경하는 여유로운 시간이다.
버스와 기차로 출퇴근하는 길은, 그가 캠리를 운전했던 경로와 다르다. 그는 문득, 자신이 캠리를 운전하면서 봤던 어떤 경치가 생각난다. 캠리를 운전해서 출근했을 당시, 그의 눈길을 끄는 장소가 하나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드넓은 평지에서, 갑자기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밭과 호수가 보이는 장소가 있다.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에 항상 곁눈질로만 본 장소다. 그는 이 깔끔한 장소에 언젠가 한 번은 방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가족들을 데려와서 같이 경치를 감상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미루다 보니 사전에 답사하지 못했고, 가족 여행 당시에도 바빠서 생각지 못했다. 매일 지나가며 봤지만 가보지 못한 미지의 장소, 그는 캠리를 폐차하고 나서야 이 장소에 가보고자 한다.
해당 장소는 작은 돌담에 이름이 쓰여 있었다. 입에 잘 붙는 이름은 아니다. 입에 잘 붙지 않으니, 정확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그는 자신이 캠리로 출퇴근했던 경로를 구글 맵으로 검색해서 비슷한 이름을 찾는다. 경로를 몇 번이고 훑고 나서 찾아낸다. 입에 잘 붙지 않던 이름은 Bunurong Memorial Park다.
Memorial Park란 말을 들으니 그는 약간 의구심이 생기지만, 그래도 황금빛 노을 밑에 펼쳐졌던 경치가 생각난다. 대중교통으로 경로를 검색하니, Bunurong Memorial Park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목적지로 설정하고, 구글 맵의 안내를 따라 버스를 탄다.
버스는 그가 캠리를 타고 지나갔던 도로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그를 내려준다. 내려서 건너편을 보니, Bunurong Memorial Park다. 그는 아직 Memorial Park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 호주에서 Memorial이 붙은 장소는 주로 군인이나 역사 관련 장소가 많다. 하지만 그는 몇 차례의 경험에도 이를 깨닫지 못했다. 여긴 다를 것이라고, 이곳의 Memorial 뜻은 기념할 만큼 경치가 좋은 것일 거라 생각한다.
안으로 들어간다. 입구에 이름이 적혀 있는 작은 돌담을 빼고는, 이 Bunurong Memorial Park를 외부와 구분 짓는 담이나 벽은 없다. 다만, 다른 곳은 관리가 되지 않은 흙바닥이거나 잡초 투성이지만, 이곳은 정원사의 손길이 느껴지는 푸른 잔디밭이다. 잔디밭과 흙바닥이 만나는 곳이 경계인 셈이다. 잔디밭은 몇몇 건물과 호수를 감싸고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좁은 도로가 길게 뻗어있고 호수에 이르러서야 도보가 나온다. 호수도 꽤 큰데, 호수 건너편 건물로 바로 직행할 수 있는 다리가 호수를 가로지른다. 다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직선이다. Bunurong Memorial Park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긴 도로를 지나 호수를 건너는 다리, 다리 저편의 조그만 건물까지 일직선으로 뻗어있고 시야가 확보된다. 눈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늘도 푸르다. 그는 캠리로 출근할 때 봤던, 호수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를 꼭 밟아서 건너보고 싶었다.
그는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해가 화창하고, 잔디가 푸르다. 이 Memorial park는 넓고, 전체 부지의 80%가 잔디밭, 15%가 호수다. 걸어서 못 갈 거리는 아니지만, 차로 느리게 가는 것이 더 편한 그런 적당한 크기다. 걸어가면서 보니 낮은 건물 몇몇이 띄엄띄엄 보이고, 가끔 비석 같은 것들도 보인다.
마침내 호수에 도착한다. 다리를 건너면서, 그는 아이처럼 설렌다. 경치가 좋은 장소, 호수 위의 깔끔한 다리를 밟아서 건너니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호수가 크기 때문에 다리도 길어서, 약 5분 정도 걸어간다. 그는 다리 한가운데에서 사방을 돌아본다. 저편에, 서양식 성당 건물이 하나 있다. 하얀 시멘트와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로, 작은 건물임에도 이 park 안의 건물 중 가장 크다. 그는 마침내 다리 끝에 도달한다. 호수를 건너는 다리는, 한 건물에 연결되어 있다. 그는 이 건물에 들어간다.
건물은 1층 원형으로, 장식이 없고 유리로 되어 있다. 안을 보니, 하얀 테이블과 다과 같은 것이 놓여 있다. 이용객이 아무도 없다. 그는 한켠에 위치한, 팜플렛 같은 것을 본다. 팜플렛에는 이 시설이 제공하는 Service들이 안내되어 있다. 대부분의 서비스가 Funeral, 장례식이다. 그는 그제서야, 무언가 불편했던 느낌의 실체를 깨닫는다.
Bunurong Memorial Park, 이곳은 장례식장이자 공동묘지다. 그가 호수를 건너면서 보았던 작은 성당 건물은, 해당 종교식 장례식을 원하는 고객들을 위한 장소다. 팜플렛에 친절하게, 기독교식 장례도 가능하다고 쓰여 있다. 그는 공동묘지에 들어와서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경치 좋은 곳이 공동묘지라는 사실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약간 짜증이 나기도 한다. 호주에서 그가 잔디밭과 드넓은 하늘이 펼쳐진 경치 좋은 장소를 가면, 꼭 공동묘지나 장례식장이다. 왠지 그는 들어가선 안 되는 듯한 장소다. 그는 약간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만일 가족 여행 때 그가 가족들을 이 장소에 데려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직접 답사하기 이전에는 이곳이 공동묘지인지 몰랐다. 만일 그가 사전답사 없이 그저 '경치 좋은 곳'이라 생각해서 가족들을 데려왔다면, 그는 가족들에게 호주 공동묘지 관광을 시켜드린 셈이 된다. 그는 자신이 가족들을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니, 나름 뿌듯한 점도 있다. 그가 경치가 좋다고 인정한 곳이, 다른 이들이 떠나간 사람을 추억하는 장소로 정돈되고 꾸며놓은 장소다. 그는 자신에게, 묏자리를 알아보는 재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경치가 좋고 아름답게 꾸며놓은 곳을 그가 알아본 것인지, 그가 알아본 자연경관을 사람들이 택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전자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공동묘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처음처럼 마음 놓고 경치를 즐길 수가 없다. 어쨌든 경치는 매우 좋다. 그는 호수 주변을 한 바퀴 휙 돌아보고, 멀리 성당 건물도 가본 뒤에 밖으로 향한다. 처음 들어온 입구가 곧 출구다. 다행히 장례식이나 사람들이 없어, 그는 눈치 보지 않고 공동묘지를 구경했다. 그가 출구에 거의 도달했을 때, 한 대의 차량이 안으로 들어간다. 차량 운전자가 그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떠난 여행이, 의도치 않은 공동묘지 관광으로 끝난다. 그는 이제 호주에서 Memorial Park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는 오히려 차가 있을 때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가끔 이런 식의 짧은 여행을 다닌다. 캠리는 운전과 주차를 신경 쓰느라, 자유도가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여행 다닐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폐차 이후 대중교통을 이용하자 운전과 주차에 대한 부담이 사라진다. 그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일종의 해방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그는 점점 살이 빠진다. 건설현장 일을 나가지 않으니 수입이 줄었다. 수입도 줄었고, 쇼핑센터를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가기엔 귀찮다. 도미노 피자와 헝그리 잭스는 차가 있어야 갈 수 있는 위치다. 그는 반강제로 쇼핑센터, 도미노 피자, 헝그리 잭스를 덜 가게 된다. 또한 반강제로 정류장과 기차역을 걸어 다닌다. 사소한 차이도 쌓이면 큰 효과를 보인다. 그는 캠리를 운전하는 동안 살이 쪘고, 폐차 직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살이 빠져 다시 워홀 초창기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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