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사건도 있었고, 그가 사는 숙소에서 멜버른 도심까지는 너무 멀다. 그는 도시로 거처를 옮기고자 한다. 캠핑카 픽업 장소도 멜버른 중심부다. 검트리와 한인 웹사이트로 쉐어하우스를 검색한다.
멜버른은 역시나 주거비가 비싸다. 그는 멜버른 생활 초창기에 대마초 연기가 항상 자욱한 롯지(Lodge)에서 지낸 적이 있다. 아무리 돈을 아끼더라도, 그런 롯지에서 다시 생활할 생각은 없다. 그는 웹사이트에 올라온 쉐어하우스 공고를 까다롭게 따진다. 비용은 저렴하면서도, 대마초 소굴같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최악의 환경은 피해야 한다.
그는 검색하면서 나오는 숙소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브리즈번과 비교했을 때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싼데, 숙소는 터무니없이 열악해서 그 값에 한참 못 미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멜버른의 주거비는 이미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 결국 그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타협한다. 독방은 고사하고, 적당한 가격에 쉐어메이트가 10명이 안 넘길 바랄 뿐이다.
한인 웹사이트에서 그나마 덜 열악한 공고를 발견한다. 사진을 보니, 거실 같은 곳에 커튼을 쳐서 대강 구획을 나누고 2층 침대를 4개 들여놨다. 조금 넓은 원룸에, 8명이 우글우글 산다. 이중 한자리가 남는다는 공고다. 그의 기대에는 한참 모자라지만, 가격이 평균보다 약간 저렴하다. 한인 웹사이트에 올라오긴 했지만, 쉐어메이트들은 모두 외국인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공고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한다.
곧바로 답장이 온다. 인스펙션(집들이)을 잡고 집을 살펴본다. 다행히 사진을 잘 찍은 편이 아니라, 그가 상상한 것과 비슷하다. 숙소는 넓은 거실과 주방이 붙어 있고, 화장실은 하나다. 거실 공간을 모조리 2층 침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주방 공간을 제외하고는 전부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누가 집들이를 오던 말던 안에 살고 있는 세입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신경 쓸 수도 없다. 유일한 여유 공간이었을 거실을 2층 침대와 커튼으로 나누고 막아버렸기 때문에, 변변한 소파나 의자조차 없다. 세입자들은 전부 2층 침대 위에 앉거나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다.
천장에 등이 없는 것인지, 노란 스탠드 조명만 켜서 내부가 어두컴컴하다. 보이는 불빛은 스탠드, 세입자들의 눈동자, 그리고 그들의 핸드폰이 전부다. 그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커튼을 걷는 순간, 2층 침대에 있던 다른 세입자들과 눈이 마주친다. 세입자들의 눈이 빛난다. 빛나긴 하지만 열정과 희망이 보이는 눈빛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빛이 그들의 안광일 뿐이다. 어둡고 비좁은, 2층 침대가 가득한 숙소에서 눈만 반짝거리는 세입자들을 보며 그는 이 장소가 닭장 같다고 생각한다.
한인 웹사이트에 공고가 올라왔으니, 집들이를 안내하는 이는 한국인이다.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으로 보아, 멜버른 유학생이다. 유학생이 어떻게 도심 한복판의 이런 주거지를 운영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유학생 본인도 이 집의 상태를 인식하고 있다. 그와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유학생은 집이 좁다고 말한다. 같은 한국인이라서인지, 그에게 여러 말을 한다. 유학생은 들어오고 나가는 세입자 관리만 하고 실제로는 이 집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 멜버른 도심에 위치한 집 치고는 가격이 싸기 때문에 세입자들이 나가도 금방 채워진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 집의 위치는 상당히 좋다. 그야말로 멜버른 도심 정중앙이다.
유학생 또한 타지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냉소적인 태도가 살짝 말투에 묻어 나온다. 그는 처음 공고를 봤을 때, 세입자들에게서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먹으려는 표독한 임대인을 상상했다. 하지만 유학생의 겉모습이나, 말하는 내용들을 보았을 때 그의 상상과는 괴리가 크다. 아마 유학생 본인도 이 집을 임대해서 재임대를 주는 것일 텐데, 도심 정중앙의 집이므로 세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8명 이상씩 꽉꽉 채워 넣어도 이익이 얼마 남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유학생의 표정과 말투를 통해 상황을 유추해보며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유학생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니, 그도 자신의 속내를 가감없이 이야기한다. 한 달만 있다가 멜버른을 떠날 계획이다. 지금 당장 노티스를 주겠다. 최대한 깨끗하게 쓰고 그가 나가는 날 다른 사람이 바로 입주할 수 있도록 청소할 테니, 세를 조금 깎거나 보증금을 없애주면 안 되겠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유학생은 약간 당황하더니, 보증금은 받지 않아도 되나 세는 많이 깎아주기 어렵다고 한다. 10불 정도 깎아줄 수 있다고 덧붙이는 유학생의 제안을 그는 바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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