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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212 - 재담꾼, 요리사, 사진사

 쿠버 피디를 떠나, 해질 무렵 도착한 Caravan에서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낸다. 남쪽 지역에서는 무료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고 잤지만, Outback에 들어선 뒤로는 Caravan에서 잔다. Caravan은 사전적 의미로는 '차에 매달아 끄는 이동식 주택', '말이 끄는 마차'라는 뜻이지만 로드 트립을 하는 이들이 쉬어가는 캠핑장이란 의미로 쓰인다. 지평선이 끝도 없이 펼쳐진 호주 내륙 Outback에는 중간중간 여행객들을 위한 Caravan park가 있다. 카라반 파크라고 해도 별다른 시설은 없다. 공용으로 쓸 수 있는 수도꼭지가 있으면 카라반 파크다. 더 좋은 카라반 파크에는 화장실이나 샤워실, 전기선도 있다. 편의시설이 많아질수록 요금을 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수도꼭지만 있는 카라반 파크는 대부분 무료다.

 

 로드 트립을 계속하면서, 차량 내부가 점점 난장판이 된다. 처음에는 어색한 사이여서 서로 눈치를 보며 조심했다. 하지만 점점 친해지면서, 다들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진다. 속옷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그도 옷걸이를 꺼내서 여기저기에 수건을 걸어놓는다. 차주도 솔선수범해서 여기저기에 물건을 널어놓는다. 

 

 짐이 꽉 들어차 있긴 했지만 정돈되어 있던 트렁크도, 갈수록 난장판이다. 처음에는 조리 도구, 캠핑 의자, 텐트 등을 쓰고 나서 깔끔하게 닦고 접어서 트렁크에 넣어두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캠핑을 하며, 이동을 할 때마다 짐을 넣었다 꺼내기를 반복하다 보니 다들 정리 작업에 지친다. 어차피 조금만 가면 또다시 꺼내야 할 물품이니, 굳이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조금씩 정리를 대충 하더니, 결국은 그냥 구겨 넣고 트렁크를 닫는다.

 

 

 핸드폰 충전은 차량 배터리에 케이블을 꽂아 2시간 정도씩 번갈아가며 한다. 그의 핸드폰은 벌써 배터리가 맛이 갔는지, 충전을 해도 해도 모자라다. 다행히도 그의 핸드폰은 로드 트립에서 별 쓸모가 없다. 그는 통신사로 옵터스를 쓰는데, 옵터스는 해안가 대도시에서는 잘 터지지만 호주 내륙 지역 Outback의 거의 모든 구역에서 먹통이다. Outback에서 잘 터지는 통신사는, 오로지 Telstra(텔스트라)  뿐이다. 그는 텔스트라가 비싸서 옵터스를 썼는데, 역시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호주 내륙 지역을 통과하는 로드 트립을 계획한다면, 일행 중 반드시 핸드폰 통신사로 텔스트라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비상시에 구조 요청이나 연락을 위해서다. 그의 일행 중, 차주와 독일인의 핸드폰이 텔스트라다. 차주와 독일인의 핸드폰은, 아웃백 한복판에서도 도시처럼 잘 터지고 데이터 이용도 문제없다.

 

 운전도 돌아가면서 하고, 좌석 배치도 계속해서 바뀐다. 그는 뒷자리에 앉았다가, 조수석에 앉았다가, 운전석에 앉기도 한다. 차주는 주로 앞좌석에만 앉다가, 조금씩 뒷좌석에도 앉기 시작했다. 독일인도 모든 좌석을 돌아다니며, 프랑스인은 주로 뒷좌석에 앉는다. 

 

 

 그는 자신이 로드 트립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뿌듯하다. 호주까지 와서, 남들은 경험해보지 못할 값진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외국인들과 로드 트립을 한다! 그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시작하며 설정한 3가지 목표(영어, 경험, 돈) 중 2가지를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래서 그는 함께 로드 트립을 하는 Travelmate들에게 잘해준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 철없는 생각이지만, 당시의 그는 그랬다.

 

 창밖 풍경은 멋있지만 변화가 없고, Travelmate들은 운전을 하는 동안 차에서 계속 붙어 지낸다. Travelmate들이 트는 음악도 영어, 하는 대화도 영어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으니 핸드폰을 볼 일도 없다. 그는 마침내, 속으로 하는 생각조차 영어로 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그의 영어가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이전까지의 그는 키친핸드, 청소, 공장, 건설현장, 웨이터 등의 일(아르바이트)을 하며 일할 때 쓰는 영어를 배우고 구사했다. 하지만 그가 느꼈듯, 일할 때 쓰는 영어는 정해진 패턴과 한계가 존재한다. Travelmate들과 내내 붙어서 영어로만 대화하면서, 그는 마침내 일하는 영어의 한계를 뛰어넘게 된다. 물론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그는 시도때도 없이 말을 하고 실없는 우스갯소리도 많이 한다. 영어가 향상되는 자신의 모습에 신이 나서 말을 더 많이 한다. 이런 그의 모습에, Travelmate들은 그가 굉장히 쾌활하고 재밌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속으로는 가볍고 실없는 사람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 중 그의 영어가 가장 많이 향상된 시기는, Travelmate들과 로드 트립을 한 시기다.

 

 

 그는 자신의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는 Travelmate들에게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는 재담꾼이자, 요리사이자, 사진사다.

 재담꾼 - 영어 연습도 할 겸, 재밌는 이야기를 해서 웃음을 선사한다. 그는 자신이 호주에서 겪은 상황들을 주로 이야기한다. 일하면서 겪은 일들, 멜버른에서 벌금 폭탄을 맞은 일, 차를 폐차한 일 등이다. 프랑스인과 독일인은 그에게,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재주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속으로 더 신이 난다.

 요리사 - 키친핸드를 통해 요리 실력도 조금 생겼으니, 캠핑장에서의 요리도 그의 주도 하에 이뤄진다. 식재에 쓸 돈이 한정되어 있고, 조리 도구도 열악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Travelmate들은 부족한 그의 요리도 맛있게 먹는다. 

 사진사 - 그는 외모가 다른 Travelmate들이 신기하다. 그는 로드 트립을 하는 동안, Travelmate들의 사진을 많이 찍어준다. 특히 독일인과 프랑스인을 많이 찍는다. 독일인은 키가 커서, 사진을 대충 찍어도 유럽 하이틴 모델 같은 비율로 잘 찍힌다. 프랑스인은 멋진 배경을 찾아내서 알맞은 위치에 자리 잡는 감각이 탁월하다. 그는 Travelmate들의 사진을 찍으면서, 약간은 관찰자가 된 느낌이다.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사진사의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그는 Travelmate들에게 여러 기능을 제공하면서도,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자신은 이렇게 많은 기능(기술)을 가진, 다재다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안 좋게 생각하자면 그는 Travelmate들의 허드렛일을 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원래부터 기능적인 것, 손재주를 동경했다. 이후의 인생에서 만일 캠핑을 할 상황이 생기면, 이번 로드 트립 경험을 토대로 더 능숙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계산 아래, 그는 Travelmate들이 꺼리거나 잘하지 못하는 일들은 더더욱 본인이 직접 나섰다.

 

 무조건적인 호의는 언제나 부작용을 낳는다. 처음에는 고마움을 느끼던 Travelmate들 중, 나중에는 그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가 생겨난다. 반복되는 로드 트립 일상에서, 조금씩 그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 맛이 없어진다. 배우는 맛이 없다면 그저 노동일뿐이다. 노동이 되자 그는 이를 Travelmate들과 분담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이미 그의 호의에 익숙해진 Travelmate도 존재했다. 그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갈등이 표출되는 시점은 로드 트립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이다. 그때까지는, 새로운 경험/기술/영어를 배운다는 생각에 그는 한없이 Travelmate들에게 잘 대해주었고 Travelmate들도 그를 쾌활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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