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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210 - Camp Fire, 밤하늘

 로드트립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됐지만, 다들 텐트를 설치하는 모습이 능숙하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텐트를 설치하고 버텼던 것이 도움이 된 듯하다. 차와 텐트들이 화로 주변을 동그랗게 감싼다. 중심점만 잡히면, 말하지 않아도 각자 알아서 적당한 위치에 텐트를 친다. 전에는 차가 중심점이었다면, 이번에는 화로가 중심이다. 중심점 역할을 화로가 대신하고, 차량이 일종의 벽 역할을 한다. 그는 벽처럼 서 있는 차량을 보며, 안정감을 느낀다. 트렁크에서 캠핑 장비들을 모조리 꺼낸다. 그가 주말 시장에서 일할 때 봤던 임시 테이블도 있다. 차주는 테이블에 캠핑 의자도 2개 있다. 화로 주위에 펼쳐놓으니, 미약하지만 아늑함이 느껴진다.

 

 

 텐트와 캠핑 용품 설치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불을 피운다. 이전에 캠핑했던 사람들의 매너인지, 화로 옆에는 굵직한 장작과 잔가지들이 꽤 많다. 충분하지는 않아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나뭇가지와 장작을 줍는다. 국립공원 내에는 나무가 많고, 죽은 나무도 많다. 그는 독일인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땔감을 한 아름 주워서 화로 옆에 내려놓는다.

 

 호주인들은 어디서 배운 것인지, 불을 피우는 데 익숙하다. 예전에 데이빗이 그랬고, 차주도 그렇다. 차주는 손기술이 좋은 편은 아닌 듯하며, 불을 피우는 것도 약간 어색하다. 하지만 하는 방법은 알고 있다. 속에는 잔가지부터 시작해서 겉에 굵직한 장작들을 쌓아 올리고, 휴지에 불을 붙여 속에 밀어 넣는다. 잔가지에 불이 옮겨 붙어서 조금씩 커진다. 잔가지의 불이 굵직한 장작으로 옮겨 붙으면 캠프 파이어 완성이다.

 

 

저녁 메뉴는 파스타다. 냄비에 물을 담아, 버너로 끓인다. 수도나 전기 등이 전혀 없는 대자연 속이니, 조리를 단순하게 한다. 4인분의 면을 끓인 뒤, 식료품점에서 산 스파게티 소스를 붓고 그냥 섞어서 먹는다. 특별할 것 없지만,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을 보며 대자연 속에서 먹는 맛은 뭔가 다르다.

 

 파스타를 먹고 난 뒤, 대강의 설거지를 한다. 물을 아껴야 하므로, 최소한의 설거지만 한다. 차주는 컵도 4개를 가져왔다. 각자 컵에 우유나 물을 들고, 화로 주위에 모여 앉는다. 그는 나무 그루터기에, 독일인은 화로 옆 돌덩어리에, 차주와 프랑스인은 캠핑 의자에 앉는다.

 

 모두들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정신이 불에 쏠려 있다. 불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뜨겁다. 그는 화로의 불과 밀고 당기듯,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앉아 있다. 불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눈이 조금씩 뜨거워진다. 타오르는 불은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 평상시보다 눈을 덜 깜빡이며 볼 수 있다. 눈을 깜빡이지 않은 상태로 계속 불을 쳐다보고 있으면, 액체에 가까운 안구가 점점 더 뜨거워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눈이 끓어서 익어버리겠다는 느낌이 들 때가 되어서야 그는 눈을 깜빡인다. 깜빡이거나 시선을 잠시 돌리면 눈은 금세 식어 평상시의 차가움을 되찾는다.

 

 

 그는 Travelmate들과 이야기하면서도 불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다른 Travelmate들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안구가 뜨거워질 때 즈음 눈을 깜빡이면서 계속 불만 바라보고 말한다. 졸린 듯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약간은 최면 상태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불을 보면서 대화하면, 불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에 뇌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말이 그대로 나와버린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야기할 때도 있고, 감추고 싶은 속내를 털어놓을 때도 있다.

 

 Travelmate들과 대화하는 것인지, 불과 대화하는 것인지, 그는 이 몽롱한 상태를 만끽한다. 해가 저물어 깜깜하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인다. 그가 호주에서 본 인상 깊은 밤하늘의 마지막이 바로 Flinders Range의 밤하늘이다. 불빛은 캠프파이어와 별빛밖에 없다. 빛나는 별들 아래 함께 불을 보고 있는 Travelmate들을 돌아보며, 그는 자신과 Travelmate들이 같은 부족 같다고 느낀다.

 

 어느새 다들 말없이 불을 보며 앉아있다. 같이 있으면서도 따로 있고, 따로 있으면서도 같이 있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지만, 뭔가 말을 해야 될 것 같다는 압박감이나 어색함이 전혀 없다. 옆에 있는 돌이나 나무를 일부러 웃겨줘서 분위기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Travelmate들의 존재가 사람으로 느껴지기보다는 그냥 옆에 있는 '무엇'으로 느껴진다. 오히려 그러한 존재감 덕에, 사람을 대한다는 압박감이나 어색함에서 벗어나서 그 상황과 존재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당시에 이러한 것들을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꼈다. 불 덕분에, 함께 있으면서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같은 불을 보며 같은 집단 무의식을 공유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즐기고 있던 불과의 대화가 끊어진다.

 

 프랑스인이, 차주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소리 내어 묻는다. 차주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린다. 그는 무시하고 불과의 대화를 지속하고자 했으나, 프랑스인의 목소리가 점점 짜증이 묻어난다. 프랑스인은 차주의 어떤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 그는 눈을 돌려, 무슨 일인지 살펴본다. 차주의 행동이 약간 이상하다. 차주는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있는데, 끄트머리에 꺼지지 않은 불씨가 남아 있다. 차주는 나뭇가지 끄트머리를 화로에 대어 불씨를 만든 다음, 이 불씨가 꺼지기 직전 자신의 발목에 가져다가 댄다. 차주는 발목 수술을 한 적이 있고, 이렇게 불씨를 갖다 대면 지속적으로 차주를 방해하는 발목의 통증이 약간 가신다고 말한다. 프랑스인의 직업은 의사다.

 

프랑스인 : 의사를 찾아가지 않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차주 : 의사를 찾고 수술도 했지만, 미약하게 지속되는 통증이 남았다.

프랑스인 : 그러면 약을 처방받으면 되지 않냐

차주 : 먹어봤지만 별 효과가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

프랑스인 : 나는 의사가 되기 위해 의료, 약물 관련 논문을 많이 봤다. 지금 너가 하는 건 사이비 의료 행위다.

차주 : 나 혼자서 다른 사람한테 피해 안 주고 하는 건데 뭐가 문제냐.

프랑스인 : 균에 감염될 수 있다. 너가 감염되면 주위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준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향후 너의 자식에게도 무슨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

차주 : 나는 그냥 이렇게 하는 게 좋다.

프랑스인 :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말고 혼자 산에 들어가서 살아라.

 

 언성이 높아지던 프랑스인은, 결국 대화를 중지하고 텐트로 들어가 버린다. 그와 독일인, 차주가 어색한 침묵 속에 남는다. 프랑스인이 들어가자, 차주는 다시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불씨를 만들어 발목을 지진다. 발목을 지질 때마다 차주는 조그마한 소리를 내는데, 아픔을 참으면서도 무언가 쾌감을 느끼는 듯하다.

 

 독일인은 말이 없고, 그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프랑스인과 차주의 대화를 들으면서, 솔직히 누가 옳은 것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프랑스인이 말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입을 다물어야 했지만, 에어컨 일에서 실수했을 때의 버릇이 나온다. 쓸데없이, 무언가 자신이 중재하듯 껴서 멋있게 한 마디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같은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한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하면서도 있어 보이는 단어를 섞어서 말한다. 그의 생각이나 결론은 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멋있는 말을 나불거렸을 뿐이다. 그의 의도나 알맹이는 얄팍한 것이었지만, 상황과 아예 무관한 말은 아니었던 듯싶다. 이를 듣고 독일인이, 그건 맞다며 동의한다.

 

 이내 독일인과 차주도 텐트로 들어간다. 그는 남은 장작을 전부 밀어 넣으며 화로의 불이 장작을 전부 태워 가루로 만들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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