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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

졸업

 16번째 기업으로부터 안내받은 면접날이자, 그의 졸업식 날이 밝았다. 지도를 보니, 그가 다니는 대학의 위치는 16번째 기업을 가는 방향과 엇비슷하다. 거리를 아주 손해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만한 거리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아침 일찍부터 준비한다. 학교에 들러 학위증만 수령하고, 곧바로 면접을 보러 16번째 기업으로 가야 한다.

 

 어차피 면접을 보러 가야 하니, 그는 면접용 정장을 입고 대학교로 향한다. 이뤄놓은 것은 쥐뿔도 없고 우연히 일정이 겹쳐 입은 것이지만, 졸업식 날 정장을 입었으니 다른 누가 보면 성공한 줄 알겠다고 생각하는 그다. 지하철과 버스에 몸을 싣고 대학교로 향한다.

 

 

 도대체 몇 번을 왕복했던 길인가. 그는 대학 시절 자취를 해본 적이 없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1년 내내 타지에서 살며, 혼자 집 밖에 나가 사는 경험은 다 해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집과 대학교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다만 대부분의 대학교가 그렇듯, 그가 다니는 대학교도 교통편이 심히 불편한 곳에 위치해 있다. 직선거리로는 1시간도 되지 않지만, 직행이 없어 구불구불 빙 돌아가는 지하철과 버스를 타야 한다. 

 

 지하철은 그나마 양반인데, 버스는 답이 없다. 그가 다니는 대학교의 학생들 사이에서, 해당 버스는 꽤나 악명이 높다. 배차 간격은 짧지 않고 보통인데, 등하교 시간대에는 항상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등하교를 할 때마다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기숙사나 자취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멀리서 오는 학생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기숙사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며, 자취는 돈이 들고 귀찮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자취를 고려할 만큼 대학 생활에 집중할 만한 구실을 찾지 못했다. 그의 대학 생활이 지루했던 것은, 여러 상황이 그렇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대학에 몰입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그는 대학 시절을 꽤나 심심하고 무료하게 보냈다. 요즘 말로 치면, '자발적 아싸(아웃사이더)'였다. 그의 타고난 천성은,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인싸(인사이더)에 가까운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인싸를 자처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인싸에 가까운 성격이라 하더라도, 의미 없는 술자리에서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다음날 숙취에 헤매고 있노라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전날 술자리에 같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나는 얼굴들. 다음날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여어, 어어' 등으로 부르며 해장이나 하러 가는 일상. 그에게는 대학 캠퍼스의 낭만이 이렇게 보였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그는 경영학도로, 이공계를 제외한 인문계 중에서는 그나마 상위권에 속하는 전공생이다. 하지만 그는 경영학에 뜻이 있지도 않았고, 뜻을 찾지도 못했으며,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뭔가 다른 게 있겠지. 이공계를 갔어야 했는데. 공대를 복수전공 할 수는 없나? 아, 공대 복수전공은 엄청나게 힘들다더라. 그러면 지금 전공으로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자연스럽게 그는 대학에서 색깔 없고 조용한 학생이 되었다. 조별 과제는 귀찮고, 배우는 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강의만 들으면 되는 수업이 편하고, 똑같은 옷만 입고, 인맥도 1학년 때 같이 술 마셨던 몇몇에만 한정되어 있다. 억지로 몸을 이끌고 등교해서, 대충 수업만 듣고, 혼자 학식을 먹고,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의 대학교 시절이었다. 

 

 이런 그의 무료한 대학 시절에도, 그가 유일하게 놓지 않고 꾸준히 한 것이 있으니 바로 도서관 출입이다. 대학교 시절을 의미 없게 보내고 있으니, 무엇이라도 의미를 찾아야겠다는 무의식적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달려가, 자신이 열정을 찾을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검색하며 돌아다녔다. 제대로 치열하게 한 것은 아니다. 왠지 요리에 관심이 가는 것 같아 만화 '식객'을 뒤적거려보고, 괜히 어려워 보이는 책들을 펼쳐보다가 도서관에서 몇 시간씩 잠을 자곤 했다. 자기 위안이었던 것 같다. 잠을 자더라도 도서관에서 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나 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던 도서관 가는 버릇은, 나중에나마 다행스럽게 독서 습관으로 이어지게 된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1년 다녀오면서, 자연히 그는 동급생들보다 1년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졸업을 했거나, 취업을 위해 졸업을 유예한 상태다. 유예한 1학기 동안에도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으니, 그는 추가로 더 유예를 해야하나 고민한다. 그의 대학교는 졸업 유예를 2년까지 제공하며, 무료인 대신 매 학기말 신청을 해야 한다. 그는 고민하다가, 졸업 유예를 신청하지 않는다. 졸업 유예를 신청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업 면접 때 면접관들의 질문을 피하기 위해서다. 왜 졸업을 일찍 했는데 아직까지도 취업을 못했느냐는, 이른바 공백기에 관한 질문이다. 면접에서 불리함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졸업생들의 절박한 노력인 셈이다. 그런데 그는, 이미 학교에 몸담은 기간이 너무나도 길다. 어느 면접관이 보더라도, 이렇게까지 비정상적인 재학 기간은 졸업 유예라는 속임수를 썼겠구나 예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굳이 졸업 유예를 신청하지 않았다. 아예 졸업을 해버린 상태로, 더 절박한 상태로 자신을 몰아서 어떻게든 취업에 성공하겠다는, 나름대로 배수의 진을 친 셈이다.

 

취업 여부에 따라 졸업식 날의 모습은 꽤나 극명하게 갈린다. 

 여기저기 모임을 돌아다니며 인싸로 대학생활을 하던 동기들은, 무슨 마케팅, 무슨 아이디어 공모전, 무슨 동아리 회장을 스펙으로 삼아 취업에 성공했단다. 이러한 부류의 동기들은 졸업식 날을 학수고대한다. 인싸로 지내며 한껏 넓혀놓은 인맥들이, 취업과 졸업을 축하해주러 오기 때문이다. 취업도 성공했겠다, 한껏 고조된 기분으로 멋을 내고 어디서 4각으로 각진 학사모도 빌려온다. 품에는 지인들이 넣은 꽃다발이 넘쳐나며, 기념 촬영을 위해 4각 학사모를 하늘로 던진다.

 반대로, 취업이 되지 않은 케이스는 조금 우울하다. 졸업식이어서 양복이나 학사모 등을 차려입고 오긴 하지만, 그들의 속은 썩 편하지 않다. 옆에서 왁자지껄 시끄러운 인싸 무리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취업에 성공한 동기를 축하해준다. 다른 사람들의 축하를 받긴 하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으리라.

 

 그는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상태다. 그는 먼저 졸업하는 동기들의 카카오톡 프로필 등을 보며, 이러한 모양새를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의 졸업식도 비슷하게 전개되리라. 

 

 

 대학 시절을 내내 자발적으로 고립되어 지내서인지, 대학에 별 열정과 애정이 없어서인지, 취업을 못한 그의 처지 때문인지, 그는 굳이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지가 않다. 어쩌다가 옆에서 신이 난 얼굴밖에 모르는 동기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굳이 사진을 찍으며 웃는 얼굴을 하고 싶지가 않다.

 

 그는 안 그래도 늦은 졸업을 1학기 더 유예했다. 일반적인 그의 동기들은 이미 모두 졸업을 했을 터다. 이에 더해, 마침 전염병까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는, 기존에 실시하던 성대한 행사를 모두 취소한다. 이번 졸업식은, 준비된 행사 없이 그냥 방문해서 졸업장만 수령하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희소식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학교에 도착한다. 대학생 시절 내내 수업을 듣던 경영대학 건물로 들어간다. 경영대학은 학생이 많기 때문에, 대학교 건물들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하고 꽤나 번쩍번쩍하다. 이전 같았으면 커다란 홀에 온갖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여 연설과 수여식 따위를 했겠지만, 이번 졸업식은 담백하다. 경영대학 입구에, 학위를 수령하려는 졸업생들은 몇 번 강의실로 오라는 A4가 붙어 있다. 그는 A4를 따라간다.

 

 면접 일정 때문에, 그가 학교에 들른 시간은 꽤 이르다.(오전 9시 정도로 기억한다) 해당 강의실 책상에는, 검푸른 솜털이 보송보송한 두꺼운 파일이 늘어져 있다. 이번 학기 경영대 졸업생이 이렇게나 많은가 보다, 그는 생각한다. 꽤 이른 등장에, 학위증을 정리하던 교직원은 조금 놀란 눈치다. 그가 다가가니, 교직원은 학번과 이름을 묻는다. 학번과 이름을 말하고, 그는 자신의 학위증을 건네받는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파일을 열어서 쓱 보니, 아주 옛날 초등학교 시절 받았던 무슨무슨 상과 비슷하게 생겼다.

 

 학 위 증 / 하얀 얼굴 학생 / 위 사람은 본 대학교 소정의 전 과정을 이수하고 아래와 같이 학사의 자격을 취득하였으므로 이 증서를 수여함. / 전공 : 경영학 / OO대학교 총장 아무개

 

 

 이 종이 한 장을 위해, 그 많은 시간과 돈을 갖다 바쳤구나. 그는 피식 웃음이 난다. 분주하게 정리를 하던 교직원이, 감상에 빠진 그를 부른다. 졸업식 선물이라며, 가져가라고 한다. 그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수건이란다. 그는 오히려, 학위증보다 수건을 받는 것이 더 기분이 좋다. 

 

 학위증을 수령했다는 서명을 하며, 그는 졸업자 명단을 본다.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딱 한 명 아는 친구가 있다. 1학년 시절 사귄 친구로, 술을 마시지 않아도 친했던 친구다. 연락을 해볼까, 괜히 생각해보지만 면접이 우선이다. 

 

 

 학교 앞 버스 정류장, 그는 학위증을 가방에 집어넣고 면접 자료를 꺼내 든다. 대학 시절을 어떻게 보냈건, 지나간 시간은 지나간 시간이다. 별로 후회하지도 않는다. 워킹홀리데이 경험, 그 나름대로 쌓아온 경험과 생각들이 지금의 그를 형성했다. 그것을 부정할 수도, 부정할 필요도 없다. 어쨌든 이렇게 학위증도 받지 않았나.

 

 우선은, 곧 있을 면접이 우선이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다. 다 잘 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는 16번째 기업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