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 때부터 심상치 않던 캠리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기 시작한다. 정비공은 냉각수 문제로 인해 캠리가 당장 멈춰도 이상하지 않다고 했지만, 캠리는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을 공항까지 무사히 바래다주고, 공항에서 나레 워른까지 1시간이 넘는 거리도 주파했다.
멈추지만 않았을 뿐, 캠리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는 것을 그도 체감한다. 시동을 걸 때, 틱틱거리는 소리가 길어지고 둔탁해진다. 엔진 점화를 위한 스파크 불꽃이 제대로 붙지 않아, 부싯돌을 연신 부딪히는 듯한 소리다. 시동도 한 번에 걸리지 않고, 여러 번 키를 반복해서 돌려야 간신히 걸리는 때가 부지기수다. 일단 시동이 걸리면 굴러가긴 한다. 하지만 주행을 시작하고 10분 정도 지나면 곧바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차량의 떨림도 거세진다. 페르시아 차주에게서 캠리를 처음 구매했을 때 그가 매료됐던 조용한 엔진 소리와 매끄러운 주행감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캠리에 대한 애정이 커져서, 워킹홀리데이가 끝날 즈음 캠리를 되파는 것을 고민하곤 했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함께 한 캠리, 집보다도 더 아늑하게 그를 품어준 캠리에 정이 많이 들었다. 캠리를 거칠게 대할 이름 모를 사람에게 파느니, 경치 좋고 인적이 드문 곳에 캠리를 주차해놓고 은퇴시켜주겠다는 낭만적인 상상을 하곤 했다. 이는 말 그대로 낭만적인 상상일 뿐이었고, 적당한 가격이 제시되면 캠리를 팔 생각이었다. 가격은 높게 받을수록 좋다. 그가 구매한 2200불보다 더 비싸게 팔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캠리를 되팔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 차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캠리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점점 악화되어가는 캠리를 보며, 그는 캠리를 되파는 것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캠리를 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정비소에서 고친 뒤 팔던지, 어수룩한 구매자를 찾아 속여 팔아야 한다. 둘 다 내키지 않는 방법이다. 한인 정비공의 말이 100%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냉각수와 엔진 과열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고치기 위해서 엔진 주위나 엔진을 뜯어내야 할 텐데, 호주는 인건비가 비싸다. 한인 정비소에서 최소 1000불을 부를 정도면, 다른 정비소에서 더 싼 가격을 찾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두 번째 방법은 더욱 내키지 않는다. 그는 차량을 구매하려 알아보는 동안, 웹사이트에서 해당 내용을 많이 보았다. 차량을 속여서 파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해야 하며, 가격이 낮은 차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도 속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을 들였는데, 이제 와서 도리어 본인이 선량한 구매자를 속이고 싶지 않다.
워홀러들이 타고 다니는 가격대의 차량은 엄밀히 말하자면 거기서 거기다. 20대 워홀러들은 돈이 없다. 집에서 지원해주지 않는 이상, 절대다수의 워홀러들은 3000불 이하의 차량을 구매한다. 3000불 이하의 차량을 사는 행위는, 뽑기이자 폭탄 돌리기다. 운이 좋으면 실컷 타고 더 높은 가격으로 되팔 수도 있다. 운이 나쁘면, 폐차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운이 좋은 편이 아니다.
차값보다 더 나가는 수리비를 들여 차를 고칠 생각은 없다. 그는 털털거리고 연기 나는 캠리를 그대로 탄다. 어차피 브리즈번에서 멜버른까지 지역 이동도 했고, 가족여행도 끝마친 후다. 그는 캠리를 그대로 타고 출퇴근한다. 수돗물로 냉각수만 매일 아침 채워 넣는다. 냉각수 통은 이제 하루에도 몇 번씩 동이 난다.
가족들이 돌아가고 정확히 일주일 뒤, 캠리가 멈춘다. 그는 건설현장 일을 끝내고, 웨이터 일을 하러 레스토랑으로 출근한다. 이 날만 일을 하면 주말 동안 쉴 수 있다. 캠리의 시동을 거니, 여전히 둔탁하고 틱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시동이 걸린다. 시동이 걸리지 않을까 봐, 그는 차키를 돌려서 시동을 걸 때마다 손에 힘을 준다. 더 힘주어서 키를 잡고 돌리면, 시동이 더 잘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캠리를 운전해서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그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캠리의 떨림이 커지면서 덜컹거린다. 그는 캠리의 이런 패턴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캠리의 호흡에 맞춰 알맞게 운전한다. 약 15분 정도 운전하자, 항상 그렇듯 희미한 연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연기가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는 급가속과 급브레이크를 자제하며 신경 써서 운전한다.
그런데 이 날은 심상치 않다. 희미했던 연기가 갈수록 명료해지더니, 이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차가 달리면 연기가 휘날리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연기는 시야에서 금방 사라진다. 하지만 지금 보넷트에서 나오는 연기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사라지지 않는다. 보넷트의 양 옆 틈새로, 새하얀 연기가 계속 뿜어져 나온다. 양 옆으로 연기를 뿜는 캠리는, 이를 앙다문 상태로 입가에서 연기를 내뿜는 사람 같다. 그는 자신이 영화 '고스트 라이더'의 불타는 해골이 된 것 같다고 느낀다. 캠리와 고스트 라이더는 신기하게도 레스토랑까지 멈추지 않고 잘 도착한다.
주차장에서 캠리를 식히고, 그는 웨이터 일을 시작한다. 웨이터 일을 하면서도 캠리 생각뿐이다. 왠지 오늘이 캠리의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의 경험상, 슬프거나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신기하리만치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캠리를 폐차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캠리가 집까지 버텨주어야 한다.
웨이터 일이 끝나고, 냉각수 통에 수돗물을 들이붓는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집까지만, 한 번만 더 견디라고 생각하며 시동을 건다. 두세 번 키를 돌린 끝에 간신히 시동이 걸린다. 그는 빠르게 집으로 향한다.
레스토랑에서 숙소까지는, 고속으로 달리는 국도가 대부분이다. 그는 속도를 내서 달린다. 엔진이 그나마 돌아가고 있는 동안 최대의 효율을 내야 한다. 밤에 운전할 때는 연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한계를 넘어 뜨거워진 엔진에서 나오는 연기는, 미약한 라이트에도 선명히 보일 정도다. 계기판 온도계 바늘은 빨간 영역을 아예 뚫고 넘어가버릴 기세로 가리키고 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가로등 불빛에 연기가 더욱 선명해진다. 캠리는 보넷트 양 끝, 이를 앙다물고 입가 양 끝으로 연기를 분출하고 있다. 그는 또다시 고스트 라이더가 된다. 멈추지 않는다.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는 악셀을 밟는다.
고속도로가 끝나는 지점, 그의 숙소에서 5분 떨어진 신호등 신호에 걸려 멈춰서자마자 캠리는 털털거리더니 시동이 꺼져버린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말로만 듣던 상황, 그의 캠리는 고속도로에서 멈춰버리고 만다. 다행히도 외곽이고, 늦은 밤이라 차량이 거의 없고,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는 중이었으므로 덜 위험한 위치다. 이미 몇 번이고 예상한 상황이었으므로,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말로만 듣던 상황을 마주해서 황당하긴 하지만, 화가 나거나 좌절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웃음이 난다. 숙소에 가깝고 덜 위험한 지점까지 버텨준 캠리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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