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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198 - 고층 빌딩 현장

 그는 멜버른 도심 정중앙의 쉐어하우스로 이사한다. 좁은 공간에 2층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그는 이 쉐어하우스를 이른바 '닭장 쉐어'라고 생각한다.

 

 공간은 비좁고, 주방 또한 음식을 요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단점을 상쇄할 정도로, 쉐어하우스의 위치가 좋다. 멜버른 대로변까지의 거리가 걸어서 2분이며, 그가 일하는 고층 빌딩까지는 걸어서 15분이다. 출퇴근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되니,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긴다. 일이 끝나고 거리를 오가면서도 볼거리가 많다. 그는 가족들과 멜버른 도심 여행을 해보긴 했으나, 살면서 매일같이 보는 도심 거리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긴다. 숙소가 위치한 뒷골목에는 카페가 많다. 그는 항상 인파를 헤치며 집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알고 보니 그의 숙소 앞 뒷골목은 멜버른에서도 유명한 카페 거리였다. 그는 이 사실을 나중에 떠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된다.

 

 

 그는 아침 7시 30분쯤 고층빌딩 앞으로 출근한다. 10명 정도의 한국인 무리에 섞여서 고층건물 현장으로 들어간다. 건물 외관은 번쩍거리지만, 건물 출입구로 향하는 구간은 합판으로 가벽을 친 흙바닥 길이다. 그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작업화를 신고 있다. 새로운 건설현장에 들어서니 기분이 싱숭생숭하면서도 떨린다. 낮은 층수에는 이미 내부 마감과 바닥 카펫 작업이 끝났기 때문에, 흙먼지를 방지하기 위해 작업화에 하늘색 캡을 덧대서 신는다.

 

 고층 건물의 저층은 건설사와 인부들의 아지트다. 1층은 인부들의 안전 교육을 담당하는 회의실, 건설사 사무실 등이 위치해있다. 2~4층에는 주차장같이 뻥 뚫린 공간에 여러 자재가 담긴 팔렛트와 인부들의 휴식 공간 등이 있다. 인부들은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기 전, 반드시 1~4층에 삼삼오오 모여서 전달 사항을 확인한 후 각자의 일이 있는 층수로 퍼져나간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데 특히 4층 엘리베이터 앞의 줄이 길다. 줄이 너무 길기 때문에, 성격이 급한 인부는 물론 느긋한 인부조차도 그냥 계단으로 올라가곤 한다.

 

 

 그와 한국인 무리를 제외하면, 고층 빌딩 인부의 대다수는 백인이며 가끔 뉴질랜드인들도 보인다. 한국인들과 친했던 뉴질랜드인 인부가 한 명 있다. 현장 엘리베이터에서 '엘리베이터 보이' 역할을 수행하던 인부다. 해당 인부는 전형적인 뉴질랜드인, 즉 키위다. 뉴질랜드인들은 덩치가 크고 피부가 짙은 갈색이며 외모는 동양적이다. 중동인의 외모는 동양과 서양이 섞인 듯하면서도 서양에 가까운 느낌이라면 뉴질랜드인의 외모는 동양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뉴질랜드인은 크게 폴리네시아 인종에 속한다. 폴리네시아인은 태평양 중동부 폴리네시아 제도에 사는 원주민들을 일컫는다. 섬과 제도가 많은 태평양 특성상 폴리네시아 인들은 고대부터 항해술이 탁월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폴리네시아 인들은 하와이 / 이스터 섬 / 뉴질랜드 / 사모아 등 태평양 연안에 넓게 분포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가 바로 이 폴리네시안 원주민들의 대항해 시대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 속 마우이의 모습처럼, 폴리네시안 중에는 골격이 큰 사람이 많다. 뉴질랜드는 세계적인 럭비 강팀이며 유명 배우 드웨인 존슨, 제이슨 모모아가 폴리네시안 계통이다. 제이슨 모모아는 영화 아쿠아맨에서 파도와 물고기 모양 문신을 온몸에 휘감고 있다. 해당 문신은 폴리네시안 전통 문신과 매우 유사하다. 배우 캐스팅과 문신을 보았을 때, 아쿠아맨은 고증과 상상을 적절히 조합한 슈퍼히어로다.

 

 엘리베이터 보이도, 덩치가 크고 피부는 짙은 갈색에 외모는 친근하다. 덩치가 상당히 큰데 엘리베이터에만 앉아있길래 의아했는데, 현장에서 일하다가 몸을 다쳐서 잠시 엘리베이터 보이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엘리베이터 보이는 한국인 인부들이 그만두고 얼마 뒤부터 보이지 않는다. 건설현장 특성상, 각자 맡은 일이 끝나면 다른 현장으로 옮기기 때문에 친해질 즈음 없어지는 인원들이 많다.

 

 멜버른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일주일이 지나자 전부 본업으로 돌아간다. 출장 인원들도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매니저는 그를 좋게 봤는지, 원래의 단기 알바 기간 후에도 그가 일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이제 남은 한국인은 그와 기술자뿐이다. 매니저도 본업으로 돌아갔지만, 지속적으로 다른 외국인 인력을 뽑아 공급하고 있다. 그는 매니저와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매니저로부터 급여를 지급받는다. 한국인들이 빠져나간 뒤, 에어컨 팀 규모는 절반으로 줄었다. 기존의 관리자과 기술자, 매니저가 뽑은 외국인 인부 3명이 전부다.

 

 

 에어컨 재시공팀의 원래 임무, 70층까지의 에어컨을 고치는 일은 2주일 만에 끝났다. 기존의 일은 끝났으나, 관리자와 기술자는 여전히 바쁘다. 건설사로부터 계속해서 민원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술자와 함께 다닌다. 날마다 일하는 층이 다르며 점점 고층으로 올라간다. 기술자가 에어컨을 뜯고 배선을 만지면, 그가 다시 조립하는 식의 나날이 이어진다.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 전경은 더욱 만족스럽다.

 

 고층 빌딩 건물은 층층마다 모습이 다르다.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공사가 덜 되어 있다. 저층에는 이미 페인트, 싱크대, 화장실 타일, 전기 등 인테리어까지 모두 마무리되어 깔끔하다. 층수가 높아질수록 이 목록에서 빠지는 것이 많아진다. 40층 위로는 싱크대가 안 되어 있고, 50층 위로는 싱크대에 화장실도 안 되어 있고, 60층 위로는 싱크대에 화장실에 전기 공사도 안 되어 있는 식이다. 100층 위는 아직 외부 마감 공사도 덜 되어서, 여기저기 유리창이 없는 곳으로 강한 외부 바람이 들이친다. 내부 마감은 전혀 진행되지 않아 회색빛 콘크리트와 배관, 배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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