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며칠 더 일하고 그만둔다. 그는 자신의 실언으로 에어컨 팀의 일이 크게 늘어나진 않을지 걱정했지만, 이는 본인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상황은 똑같다. 일하다가 호출되어 모이면, 건설사 직원들은 이전과 똑같이 왜 이렇게 조립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는 입을 닫고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매니저를 통해 고용된 인부였으므로, 기술자와 관리자는 그가 그만두는 사실을 모른다. 그는 관리자와 기술자에게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말한다. 관리자는 그의 실수를 까맣게 잊은 듯, 평소와 같이 웃는 얼굴로 다시 보자고 말한다. 기술자는 표정 변화는 별로 없지만 놀란 눈치다. 한국인 인부들이 그만둔 후, 그는 매일같이 기술자와 같이 일하며 점심을 먹었다. 기술자는 빌딩 근처 일식집의 라멘을 좋아한다. 기술자는 출장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시 보기가 힘들 것 같지만 혹시 시간이 되면 보자고 말한다. 기술자는 그에게 수고했다며 명함을 건넨다. 그는 뻔질나게 이사를 다니면서 수없이 짐을 싸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기술자의 명함을 잃어버린다.
그는 기술자와 출장 인원들을 보며, 해외 출장의 실상을 조금 파악한다. 해외 출장이라고 하면, 잘 모르겠지만 왠지 좋게 들린다. 교통비, 식비 등은 출장비로 지급되고 숙소도 호텔이다. 직접 돈 안 들이고, 일과 여행을 모두 성취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일한 한국인들의 해외 출장은 만만치 않다. 노동 강도가 약하긴 하지만, 어쨌든 에어컨 해체 및 재조립은 육체노동이다. 아침 일찍부터, 해가 저무는 오후 대여섯 시까지 빌딩 안에서 일을 한다. 그는 출장 인원들에게, 일이 끝나고 멜버른 시내도 돌아보고 관광도 했느냐고 물었다. 출장 인원들은, 저녁 먹고 씻으면 밤 8시가 다 되고 피곤하기 때문에 바로 잔다고 답했다. 가뜩이나 출장 인원들은 그보다 나이가 많다. 체력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행할 여유가 없다.
출장 인원들은 그나마 상황이 낫다. 에어컨 대기업 본사에서 파견 나온 기술자는 여유 시간이 전무하다. 다른 인부들이 모두 퇴근해도, 기술자는 마무리를 위해 건물에 남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 인부들이 빠진 뒤로는, 일손은 모자른데 기한이 다가오니 퇴근 시간이 더 늦어진다. 관리자와 기술자는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그는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늦게까지 남는다. 초창기에는 5시에 퇴근했지만, 막바지에는 퇴근 시간이 기본 7시에서 8시다. 기술자는 공사 중인 빌딩 안에서 해 뜬 내내 일하고, 해가 지면 호텔 건물로 옮겨가 잠을 자고 다시 출근하는 생활의 반복이다.
매니저는 그에게, 만나서 술 한 잔 하자고 한다. 약속 날짜를 캠핑카 픽업 바로 전날로 잡는다. 그는 어느새 몸이 되어버린 카고 바지, 검은 후드를 입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인상이 좋은 매니저와 술자리라니 기대가 크다. 매니저는 회사에서 막 퇴근한 듯한, 캐주얼 정장 차림이다.
장소는 멜버른 시내의 한인 술집, 호프집이다. 서빙하는 사람은 한눈에 봐도 한국인 워홀러다. 그와 매니저는 치킨을 시킨다. 그런데 매니저가, 차를 가지고 와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속으로 많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매니저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술자리를 굵고 짧게 끝내기 위해 그는 소주를 시킨다. 매니저는 잔만 채워서, 그가 마실 때 잔을 맞부딪히기만 한다.
그는 매니저와 이야기하면서, 건설현장의 이해관계를 완전히 파악한다. 매니저는 그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남아있게 했지만, 해당 현장에서는 책임질 일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심 그가 신경 쓰였다고 한다. 정식 건설사이므로 시급이 세고 안전 관리에 철저한 만큼, 책임 소재에 있어서도 냉혹하게 대하는 현장인 것이다.
매니저가 술을 마시지 않아서인지, 그의 예상보다 분위기가 조금 딱딱하다. 매니저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는 태도와 매너가 몸에 배어있다. 한참 어린 그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다. 매니저는 그가 지각했을 때를 말한다. 매니저는, 여러 워홀러들과 일하면서 워홀러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다고 말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나오지 않거나, 연락이 안 되거나, 15%의 세금을 떼고 돈을 지급하자 매니저가 돈을 훔쳐갔다고 말하는 등 이상한 워홀러들을 꽤 봤다고 한다. 늦잠 잤지만 일어나자마자 전화하고, 우버까지 타고 달려온 워홀러는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매니저의 말에 쑥스럽지만, 속으로는 자랑스럽다. 더불어, 자신의 태도를 알아봐주고 인정해주며 술까지 사주는 매니저가 고맙다. 매니저는 그가 늦잠 자서 지각한 시간까지 전부 일한 것으로 쳐서 돈을 송금했다고 말한다. 매니저는 중개 수수료 같은 것을 떼지 않고, 건설사가 지급한 금액 그대로 그에게 송금한 듯하다. 건설사는 노동 법규를 모두 지키기 때문에, 기본 시급이 20불이 넘으며 주말에는 2배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큰 금액을 받는다. 호주에서는 포기하다시피 했던, 한국인으로부터의 정을 느낀다.
매니저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그는 혼자서 빠르게 소주 2병을 마신다. 마시면서도 실수하지 않도록 긴장하고 조심한다. 그는 매니저에게, 곧 여행을 떠날 것이라 말한다. 매니저는 그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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