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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218 - Campers, 방어막

 Alice Springs는 호주 내륙의 도시 중 가장 큰 편이다. 그래서 캠핑장도 잘 지어져 있다. 캠핑장과 게스트 하우스가 혼합된 형태다. 커다랗고 하얀 건물 내 카운터에서 돈을 받고 주차와 텐트를 펼 구획 번호를 준다. 카운터는 건물 내 반짝반짝 빛나는 비스트로의 카운터를 겸하는데, 건물 입구 쪽 벽면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뻥 뚫려 있다. 하지만 에어컨을 얼마나 세게 틀어놓은 것인지, 따가운 햇살에도 시원함이 느껴지며 흙먼지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비스트로 내부, 그리고 에어컨 바람이 닿는 외부까지 테이블과 의자가 여기저기 놓여 있다. 테이블과 의자는 만석인데, 거의 대부분이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백인 인부들이다. 다들 형광색 작업복과 묵직한 작업화를 신었다.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있는 인부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본다. 비스트로에 걸려있는 커다란 벽걸이 TV다. TV에선 호주 풋볼 리그가 중계되고 있다.

 

 

 그는 로드트립 당시에는 내심 부정했지만, 자신의 Travelmate들이 백인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Travelmate들 덕에 백인들 틈에 자연스레 낄 수 있었다. 로드 트립 중 캠핑장에서 만나는 여행객은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동양인은 거의 없으며, 특히 나이가 많은 관광객들은 주로 패키지 트립을 이용한다. 울룰루 같은 유명 관광지에서 동양인을 마주치긴 했지만, 바로 버스를 타고 돌아가기 때문에 캠핑장에서 마주친 일은 없다.

 

 그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는 조금씩 백인들의 표정과 분위기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느낀다. 이전의 그에게 백인들은 남녀 구분만 될 뿐 같은 성별은 다 똑같은 사람같이 보였고, 백인들의 표정에서 생각이나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워킹홀리데이 기간 중 일하고, Travelmate들과 붙어 지내고, 캠핑할 때마다 백인들을 만나다 보니 조금씩 백인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게 되고 미약하게나마 표정도 읽힌다.

 

 

 로드트립 중 공용으로 이용하는 캠핑장에 가면 거의 언제나, 화로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다. 먼저 온 누군가가 피워놓은 불이다. 그리고 불 주위에 캠퍼들이 동그랗게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와 Travelmate들은 텐트를 치고 합석한다. 그는 의도한 것인지 우연히 그랬던 것인지, 대부분 Travelmate들이 먼저 자리를 잡은 후에 합류한다. 그가 다가가면 Travelmate들이 그를 맞이하며 아는 체를 하는데, 그러면 먼저 앉아있던 초면의 백인 여행객들은 그를 쳐다보며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속으로, 그런 반응을 은근히 즐긴다. 그럴 때마다 그는 Travelmate들에 대한 동지 의식이 더 강해진다. 그는 Travelmate들과 함께 합석해서 대화를 나눌 때, 초면인 다른 백인들에게서 대놓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들은 적은 없다. 운 좋게 인종차별 따위는 혐오하는 백인들만 만났던 것일 수도 있다. 인종차별주의자가 있었지만 그의 눈치를 봤거나, 그와 같이 다니는 Travelmate들의 눈치를 봤던 것일 수도 있다.

 

 그에게 Travelmate들의 존재는, 패거리이자 일종의 방어막이었다. 만일 그가 캠핑하고 있는 백인들에게 혼자 다가갔다면 대화에 끼지 못했거나 겉돌았을 수도 있다. 같은 백인인 Travelmate들이 먼저 합석하고, Travelmate들을 방어막이자 다리 삼아서 그가 합석하는 것이다. 이미 합석한 Travelmate들이 그를 맞이하니, 초면인 다른 백인들은 그의 합석을 막을 수 없다. Travelmate들로 인해, 그의 합석이 더욱 자연스러워진다. 그가 앉아서 Travelmate들과 대화하고 있으면, 먼저 앉아있던 백인들은 그에 대한 경계를 조금씩 낮춘다. 그는 쾌활하고 명랑한 상태였고, 그의 실없는 농담은 Travemate들을 넘어 초면의 백인들까지 웃게 만들기 시작한다. 초면의 백인들이 그를 '재밌는 사람'으로 여기면, 그때부터 그는 모두와의 대화에 제대로 녹아든다.

 

 

 그는 캠핑장에서 합석할 때마다 이런 패턴으로 합석했고, 늘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Alice Springs의 캠핑장에서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Alice Springs 캠핑장에서도 이전과 같이, 그는 Travelmate들보다 조금 늦게 합석한다. 앉아있던 백인들이 의아하다는 듯이 그를 보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의 실없는 농담 몇 마디면 다들 경계심을 풀게 될 것이리라. 여기까지는 그의 예상대로였다.

 

 불 앞에 먼저 앉아 있던 이들은 이렇다. 수염이 덥수룩한 맨발의 남자, 격투기 선수처럼 목이 두텁고 상체가 큰 남자, 잘생겼지만 얍실해서 쥐를 닮은 남자까지 총 셋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맨발의 남자 -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많다. 이런저런 잡다하고 세세한 것들을 계속 물어보며, 그가 대답할 때마다 매우 놀라워한다. 표면적으로는 그에게 가장 우호적이다.

 목이 두텁고 상체가 큰 남자 - 체구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있다. 그는 이런 종류의 남자다운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체구가 큰 남자와도 여러 말을 한다. 체구가 큰 남자도 비교적 우호적이다.

 잘생겼지만 얍실해서 쥐를 닮은 남자 - 그를 계속 바라보지만, 아무 말도 없다. 그도 느낌이 이상해서, 이 남자에게는 굳이 말을 걸지 않는다.

 

 밤이 무르익어가고, 불 앞에서 다들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이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아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성의 성기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국적을 불문하고 남자들은 성기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이 일하면서 듣고 배웠던, 남성의 성기에 대한 여러 농담을 써먹는다.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상체가 큰 남자에게 말한다. 체구도 크고 근육이 많으니, 성기도 강하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를 들은 상체가 큰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유머가 통했다고 생각하며 같이 웃었다. 그런데 상체가 큰 남자는,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말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웃는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간신히 끝이 난다. 상체가 큰 남자의 기나긴 웃음을 들으며, 그는 무언가 쎄한 느낌을 감지한다.

 

 

 그가 이 세 남자와 굳이 이야기를 나눴던 이유는, 자신의 재치로 인종차별주의자의 편견도 허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세 남자는, 캠핑을 상당히 오래 한 숙련자들인 듯하다. 셋 다 텐트가 크고 두꺼우며, 안에 몇몇 공간이 나누어진 것으로 비친다. 특히 상체가 큰 남자는, 자동차에 간이 냉장고와 그릴까지 가지고 다닌다. 자동차 배터리에 연결한 것인지,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 나눠주고 베이컨을 구워서 같이 먹는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맥가이버'에 근접한 남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여러 이야기를 듣고자 했던 것이다.

 

 중간에 느낌이 어땠건, 그는 세 남자로부터 배울 점을 찾는다. 이 세 남자를 보고 그는, 집 없이 차에서 캠핑을 하며 사는 것도 꽤 멋지겠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상체가 큰 남자의 차 트렁크에서 냉장고와 그릴을 보고는 더욱 확신이 생긴다. 그가 필요로 하는 집의 기능은 3가지, 잠자리 / 조리 시설 / 샤워다. 잠자리는 차량으로 대체할 수 있다. 나머지 둘, 요리와 샤워 때문에 그는 쉐어하우스에 돈을 지불했다. 만일 두 가지가 해결될 수 있다면, 그는 차에서 먹고 자고 했을 것이다. 상체가 큰 남자는 차량에 냉장고와 그릴을 연결해서 요리를 거의 완벽하게 해결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샤워뿐이다. 샤워는 로드트립처럼 이삼일에 한 번씩 하고, 매일 공중화장실에서 이 닦고 세수만 하며 지낼 수도 있다. 일은 돌아다니다가 건설현장 같은 곳에서 구하면 될 터다. 돈도 아끼고, 생활력도 기를 수 있는 방안이다. 그는 속으로, 차가 좋다면 이런 식으로 차에서 먹고자며 호주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워킹홀리데이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차가 좋다면 말이다.

 

 

 세 남자와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그는 세 남자와의 대화에서 득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후 로드 트립을 지속하던 어느 날, 독일인이 그에게 말한다. 엘리스 스프링스에서의 세 남자는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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