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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220 - 불편한 동행

 그는 정말로 엘리스 스프링스에서 중도하차할 생각을 했다. 엘리스 스프링스에서는 호주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1불 렌트카가 널려있다. 만일 중도하차한다면, 그는 퍼스로 갈 수도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다만 혼자일 터다. 차주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남아 있다. 그가 중도하차하지 않은 이유다.

 

 

 차주는 처음부터 독단적이긴 했지만, 로드 트립 초창기에는 그나마 대화가 되고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엘리스 스프링스에서부터는 더욱더 독단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차주도 이를 인식했는지, 노트북에 영화를 다운받아 자신의 텐트에서 다 같이 보자고 말한다. 4명이 모두 차주의 텐트에 옹기종기 모여 영화를 본다. 엘리스 스프링스에서 묵는 동안 두 편을 봤는데, 하나는 'Get out'이고 다른 하나는 'Gone baby gone'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는, 자신의 영어 실력이 부족함을 깨닫는다. 차주가 다운받은 영화는 당연히 자막이 없다. 그는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해하지만, 중간중간 유머나 세세한 내용은 어쩔 수 없이 놓친다. 그런데, 그가 자신보다 영어가 조금 아래라고 생각했던 프랑스인과 독일인은 곧잘 알아듣는 눈치다.

 

잠시 갈등이 있긴 했지만, 다 같이 텐트에 모여 영화를 보며 그는 다시금 피어나는 동지애를 느낀다. 프랑스인은 이렇게 다 같이 옹기종기 끼어서 영화를 보는 모습이 귀엽다고 말한다. 다들 그렇게 느꼈으리라. 차주의 표정도 좋아 보인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자 차주의 말투와 행동은 여전히 그대로다.

 

 

 차주가 다윈으로 가는 이유는, 대학원 진학을 위해서다. 다윈에 도착해야 하는 기한이 있고, 그 전에 몇몇 서류 작업을 마치기 위해 엘리스 스프링스에도 도착해야 할 기한이 있었다. 이제 엘리스 스프링스에 도착해서 그 작업이 끝났다. 차주로서는, 이제 다윈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차주는 엘리스 스프링스 이후부터, 로드 트립을 어서 빨리 끝내고 싶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엘리스 스프링스까지는 볼 것을 전부 보면서 갔지만, 엘리스 스프링스 이후에는 지나치자고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차주는 엘리스 스프링스 이후로 로드 트립에서 마음이 붕 뜬 듯하다. 해가 떨어져서 캠핑장을 찾고 텐트를 쳐야 할 시간임에도, 조금만 더 가자며 액셀을 밟아 속도를 160km까지 올리기도 한다.

 

 차주의 말투도 점점 더 비협조적으로 바뀐다. 그는 의사소통만 될 뿐 미세한 톤이나 억양은 아직 파악하지 못한다. 독일인은 그런 영어의 억양을 캐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차주가 그에게 무언가 말할 때, 독일인이 차주의 말 끝에 'please'를 붙이는 횟수가 늘어난다. 차주는 프랑스인에게는 거의 말하지 않았고, 독일인에게도 드물었으며, 그에게만 가끔씩 말을 했다. 대부분 무언가를 가져다 달라는 말이다. 그는 억양을 눈치채지 못하고 가져다 달라는 것을 가져다주었는데, 독일인은 차주의 말투에서 미세한 명령조를 눈치챈 듯하다. 차주가 그에게 'Bring that to me'라고 말하면, 독일인은 차주를 보며 'please'라고 말한다. 말끝에 please를 붙이라는 뜻이다. 그는 처음에는 독일인의 이런 호의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후에 생각할수록 고마움을 느낀다. 독일인은 그에게, 차주가 너무 Bossy(권위적)하며, 특히 그에게 그렇다고 말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잘못이기도 하다.

 

 

 그도 독일인의 말을 듣고, 조금씩 차주의 행동이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한다. 차주는 차키를 건네줄 때 집어던지기도 했다. 어느 날, 텐트를 칠 때 그가 망치를 달라고 말하자 차주는 꽤 먼 자리에서 그대로 망치를 던져버렸다. 그는 뒤돌아서 텐트를 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옆으로 묵직한 망치가 날아오면서 텐트 위에 떨어진다. 차주도 이건 잘못했다고 생각했는지, "Sorry"라고 말한다. 망치를 던지다니,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차주의 사과를 묵살한다.

 

 그는 차주와 충돌하는 일이 많아졌고, 독일인은 항상 그를 달랜다. 한 번은 그와 독일인이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차주 욕을 했다. 그는 들을 테면 들으란 식으로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고, 차주도 그에게 다 들린다고 말한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홧김에, 프랑스인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해버린다. 사실 그는 프랑스인을 좋아한다. 프랑스인은 나무를 구해오거나, 요리를 하는 등의 일을 은근히 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이 점이 별로였을 뿐이다. 문제는, 그가 성급한 말을 그것도 크게 해서 프랑스인이 들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스스로 곤란한 상황을 자처하고 있었다.

 

 

 차주는 그가 차를 운전하는 것도 탐탁지 않아한다. 그도 봉사할 생각이 없어, 엘리스 스프링스 이후부터 운전을 하지 않는다. 그는 차주와 사이가 좋지 않고, 프랑스인에게는 뒷담화를 들켰다. 차주는 모든 이들과 어색하다. 이런 냉랭함 속에서 혼자 고생하는 것은 독일인이다. 독일인은 Travelmate들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지는 않도록 달래가면서, 2교대로 운전까지 한다. 가장 어린 독일인이 가장 고생한다. 그리고 가장 나이가 많은 그가, 가장 철없이 행동한다.

 

 워킹홀리데이 당시의 그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미숙한 면이 많다. 그는 인간관계를 단순화해서 이분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중간이 없다. 즉, 친구 아니면 적이다. 그동안 그는, Travelmate들을 친구로 생각해서 한없이 관대하고 명랑하게 대했다. 웃긴 얘기로 웃겨주고, 요리도 해주고, 굳이 나서서 사진도 찍어줬다. 하지만 그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차주로 인해 분노가 쌓이고, 엄한 프랑스인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프랑스인은 조금 요령을 피우긴 하지만 미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의 섣부른 언행과 행동으로 프랑스인과의 우호적인 관계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그는 점점 말이 줄고, 뒷좌석에서 잠자는 시간이 늘어난다. 더불어 그동안 해오던 재담꾼, 요리사, 사진사 역할도 시들해진다.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할 도리는 해야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니, 남은 로드 트립이 즐거울 리가 없다. 엘리스 스프링스까지 약 3분의 2구간이 한없이 즐거웠다면, 나머지 마지막 3분의 1은 비교적 냉랭한 분위기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그가 감정을 있는 대로 분출하지만 않았다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는 로드트립 사진을 보며 이때를 회상할 때마다, 자신이 참 철없이 행동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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