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에 일어나, 매니저의 시간에 맞춰 빠르게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지만 그는 한없이 기쁘다. 얼마 남지 않은 비자에도 일을 시켜준다는 것에 감사하며, 누구보다 나서서 열심히 일한다.
일주일째 되는 날, 매니저가 그를 부른다. 차키를 주며, 저 구석에 있는 차를 빼오라고 말한다. 그는 매니저가 자신을 신뢰한다는 생각에 들떠서, 차를 빼러 간다. 그런데 차량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세차장 뒤편 주차장에는 원체 차량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차량을 붙여서 주차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 차량은 너무 심하게 붙어 있다. 그는 운전석으로 들어가는 데만도 한참이 걸린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간신히 몸을 비집고 조금씩 집어넣어 탑승에 성공한다.
그는 차량에 시동을 건다. 차가 워낙 붙어서 주차되어 있으니, 핸들을 꺾지 않고 일자로 차를 앞으로 뺀 뒤 꺾으려 한다. 그런데,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도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돌부리에 걸렸거나, 약간 경사가 있는 것 같다. 그는 차를 앞으로 빼내기 위해, 엑셀을 약간 밟는다. 차가 덜컹하더니 움직인다. 그런데 움직이는 순간, 생전 처음 듣는 소음과 진동이 느껴진다.
득, 드르르르르르르르륵!
둔탁한 소리에 맞춰 차체가 떨린다. 그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감지하고 차에서 내린다. 탑승할 때와 마찬가지로, 좁은 문틈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나온다. 차에서 내려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참담한 광경이 펼쳐진다. 그가 운전한 차량의 옆면이, 옆 차량을 긁었다.
그는 눈앞의 광경에 너무나도 당황해서, 도무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냥 모르는 척할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살짝 스치지만, 그는 곧바로 고개를 젓는다. 자신이 실수한 것은 명백하다. 또한 긁힌 부분이 그리 크지 않으니, 세차장 인원들과 열심히 닦으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그는 우선 매니저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매니저에게 알린 순간부터, 재앙이 시작된다.
그는 매니저에게, 차량 간 약간의 접촉이 있었다고 말한다. 매니저는 현장으로 와서 차량을 보더니, 말없이 곧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착수한다. 그는 매니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매니저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렌터카 본사 직원으로 보이는 백인을 데려온다. 그를 배제시켜놓고, 매니저와 렌트카 본사 직원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더니 본사 직원은 세차장 사무실로 향한다. 매니저는 그에게, 수리비로 1000불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어느 정도 수리비를 지불할 수도 있겠다고 예상하고 있었으나, 1000불씩이나 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 1000불이라는 말에, 그는 눈이 돌아가고 머리도 잘 돌아간다. 그는 매니저에게, 자신이 이 차량 두 대를 렌트하겠다고 말한다. 가장 비싼 보험을 추가해서 렌트해도 1000불은 안 들 터다. 하루 렌트해서 공항에 그대로 세워두었다가 반납하면, 나중에 렌트카 회사에서 일괄적으로 수리할 때 보험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묘수다. 그는 말하면서도,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니저는 고개를 젓는다. 이 사태는 전부 그의 책임이고, 그가 자비로 부담해야 한다 말한다. (You have to pay it all)
매니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는 사무실로 달려가, 렌트카 본사 직원을 회유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렌트카 본사 직원은 매니저보다도 더 완고하다. 그의 제안이 무엇인지는 알겠으나, 자신이 이미 알아버렸으니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은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책(book)에 적힌 대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차갑디 차가운 렌트카 본사 직원의 얼굴을 보며 말을 잃는다.
그의 잘못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이고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차를 긁지 않을 자신이 없다. 핸들도 돌리지 않았는데 긁힌 것을 어쩌란 말인가. 처음부터 닿아있던 것은 아닌가. 렌트카 본사 직원은, 공간이 좁으면 옆의 차량을 먼저 움직였어야 한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한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알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군대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그 말대로라면, 알지 못하게 속였으면 넘어갈 수 있다는 뜻인가? 그는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정직하게 말한 대가가 이렇게 가혹한 것에 대해, 자괴감과 배신감을 동시에 느낀다. 치솟았던 명랑함, 쾌활함, 자부심이 또다시 한순간에 추락한다.
그의 사정이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고, 매니저와 본사 직원은 사무실에서 종이를 인쇄해온다. 그의 눈앞에서, 종이의 여기저기를 짚으며 친절하게 확인시켜 준다. 모든 것은 그의 실수이며 그의 책임이라는 것, 그가 지불해야 하는 돈은 1000불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싸인할 자리까지 확실하게 짚어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며 서명한다.
매니저와 본사 직원은 전시라도 해놓듯이 두 차량을 세차장 가운데에 놔두었다. 세차장 동료들은 무슨 일이냐며 한 번씩 묻더니, 다시 각자의 일을 한다. 그중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일본인이, 행주를 가져와 기스가 난 옆면을 쓱쓱 문지른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거의 90% 정도의 기스가 제거된다. 그는 이를 보며 기가 찬다. 바보처럼 자진해서 돈을 가져다가 바친 셈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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