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러가 일을 하지 않으니 시간이 남아돈다. 시간이 남아도는데 돈은 없고, 가만있으면 세차장에서의 사고가 계속 떠오른다. 돈을 쓰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그는 처음에는 케언즈 해변가를 산책했다. 햇볕이 좋고, 산책하는 사람이나 조깅하는 사람이 꽤 있다. 그도 조깅하는 사람들을 따라서 뛰어본다. K-Mart에서 산 캔버스 같은 12불짜리 신발을 신고 뛰니 발이 불편하고, 그는 원래 조깅에 취미가 없다. 그는 조깅을 지루하고 힘든 운동으로 여긴다.
조깅은 그만두지만, 어쨌든 넘쳐나는 시간을 때워야 하니 해변을 따라 계속 걷는다. 케언즈는 작은 도시기 때문에 볼 것도 그리 많지 않다. 절박하리만치 시간 때울 것을 찾던 그의 눈에, 한 공놀이장이 보인다. 그는 사실 공놀이를 좋아하며, 한국에 있을 때도 종종 하곤 했다. 공놀이장을 발견하자, 그의 눈이 반짝인다.
공놀이장의 규격은, 정식 규격보다 많이 작다. 그래도 별로 상관없다. 문제는, 그에게 공이 없다는 점이다. 공을 사려면 돈이 십몇불 들 텐데, 밥도 아껴먹는 그의 입장에서는 조금 부담되는 금액이다. 그는 공놀이를 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을 때마다 말을 걸어서, 같이 공을 던진다. 그가 공을 같이 던져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공을 같이 던지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은 전체 기간을 통틀어 딱 한 명뿐이었다.
공놀이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을 걸어서 같이 공을 던지고, 가끔 뜻이 맞으면 1대 1 경기도 한다. 하지만 1대 1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일이 없으므로 해가 쨍쨍한 때에 공놀이장을 가는데, 해당 시간대는 다른 사람들이 한창 일할 때다. 낮 시간대에 공놀이장에서 공을 던지고 있는 이들은 조그만 학생이나 어린아이가 대부분이고,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는다. 공 던지는 사람이 없을 때는, 맨몸 운동이라도 한다. 팔 굽혀 펴기, 철봉을 이용한 턱걸이, 스쿼트 등이다. 근육이 피로해질 때 즈음, 그는 슬금슬금 해변가를 떠나 숙소로 향한다.
어느 날, 그가 다른 날보다 늦은 시간에 공놀이장을 찾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무렵 도착하니, 공놀이장에 성인 남자들이 많다. 흑인, 백인, 아시아인 등 다양하며 10명이 넘는다. 인원이 많으니, 팀을 나눠서 공놀이장 전체를 이용해서 경기를 한다. 그는 옳다구나 싶어, 게임에 동참하고자 주변에서 어슬렁거린다. 곧 게임이 끝나자, 그는 공놀이장 안으로 들어선다.
따로 팀을 만들어온 것도 아니고, 다들 초면이므로 그도 자연스럽게 껴서 경기를 한다. 그는 사실 한국에서 공놀이를 취미 삼아 많이 해봐서, 체형이나 공을 튕기는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함께 경기를 하는 사람들은, 공놀이를 많이 해본 사람과 처음 해본 사람이 뒤섞여 있다. 처음 해본 사람이 많을수록, 경기는 더 난장판이 된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는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공을 따라 열심히 달린다.
공놀이는 몸끼리 부딪히는 일이 많으며, 꽤나 과격하다. 그는 공놀이를 할 때 약간은 몸을 쓰는 경향이 있어서, 맡는 포지션도 몸을 많이 쓰는 역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상대편도 덩치가 크다. 이 날 그의 첫 상대는 키가 190이 넘는 흑인으로, 몸무게도 꽤 나가 보인다. 그는 공놀이를 할 때, 자신이 불리할수록 불타오르는 언더독 기질이 있다. 190이 넘는 상대방 흑인을, 그는 본인이 막아보겠노라며 의지를 불태운다.
상대방은 역시나 육체적 장점을 살려, 공을 튕기며 몸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는 의지를 불태우며, 온몸에 힘을 주고 상대방의 힘에 맞서 버틴다. 190이 넘는 상대방은, 평소대로라면 쭉쭉 밀려났어야 할 수비가 굳건히 버티자 당황한 눈치다. 상대방이 당황할수록, 그는 더욱 불타오른다. 포기하지 않는 그의 집념에, 계속해서 몸으로 밀던 상대방이 결국 소리를 지른다.
"Damn, This man is fuckin' strong!"
그는 자신보다 덩치 큰 상대방을 당황케 하고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이 날 이후,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저녁 시간대에 맞춰 공놀이장에 간다. 저녁 시간에는 공놀이장이 항상 붐벼서, 그는 매일같이 새로운 사람들과 경기를 한다. 비자 만료 때까지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거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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