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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238 - 삼총사

 매일같이 공놀이를 하러 가니, 조금씩 눈에 익는 두 얼굴이 생긴다. 이들과 같은 팀을 맺고 경기를 한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손발이 잘 맞는다. 이때부터 그는 이 두 명과 삼총사가 된다. 둘은 같은 백패커스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한 명은 일본인, 다른 한 명은 백인이다.

 

 삼총사의 손발이 잘 맞았던 이유는, 포지션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몸으로 부대끼며 치열하게 자리싸움을 벌인다. 일본인은 날씬하고 균형 잡힌 몸매에 드리블을 하는 감각이 탁월해서, 날카로운 돌파가 가능하다. 백인도 드리블을 꽤 하지만, 백인의 주특기는 슛이다. 그가 몸싸움을 맡고, 일본인이 볼 운반 및 돌파를, 백인은 슛을 담당한다. 다들 본국에서 공놀이를 꽤나 해본 솜씨다. 그냥 공을 보고 놀려고 처음 오는 사람이 많은 공놀이장에서, 이렇게 삼총사가 팀을 먹으면 지는 일이 거의 없다.

 

 나름 손발이 맞고 매일같이 함께 뛰니 조금씩 친해진다. 일본인은 영어를 잘하지 못하고, 백인은 영어권 사람이며 그는 영어를 조금 한다. 하지만 공놀이를 할 때 굳이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다. 서로의 위치를 보아가면서 손발을 맞추니, 대화로 쌓는 것보다 더 깊은 우정이 느껴진다.

 

 

 일본인은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인지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말이 거의 없다. 그래도 그는 끈질기게 일본인에게 말을 건다. 일본인도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열어, 이름을 알려준다. 일본인의 이름은 '사토루'다.

 

 사토루와 백인은 같은 백패커스에 살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다닌다. 그도 사토루와 백인이 사는 백패커스에 함께 따라간 적이 있다. 다들 말이 없어서, 삼총사는 백패커스 한가운데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서 시간을 보낸다. 공놀이를 하며 손발을 맞춘 관계라,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으로 굳어진 듯하다. 사토루도 그렇지만, 백인도 말이 별로 없다.

 

 백인은 영화 '아일랜드'의 남자 주인공인 이완 맥그리거를 닮았다. 슈터라는 포지션 때문인지, 목소리와 행동이 크지 않다. 슈터는 몰래 요리조리 수비들을 피해서 자리 잡고 슛을 쏴야 한다. 공놀이를 할 때의 포지션이 백인의 성격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원래대로라면 말이 많지만, 이 백인에게는 그다지 정감이 가지 않는다. 정감이 가지 않게 된 사건이 있다. 그는, 사토루와 백인이 이미 같이 다니는 상태에서 합류했다. 그래서 그는 사토루와 백인의 모습을 관찰할 때가 많았다. 그가 놀라우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장면은, 그들이 담배를 필 때다. 사토루와 백인 모두 담배를 피우는데, 백인이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으려 하면 사토루가 재빠르게 자신의 라이터를 꺼내서 불을 붙여준다. 한두 번이 아닌 듯한 자연스러움이다. 이외에도, 백인이 무언가 찾는 눈치다 싶으면 사토루가 재빠르게 눈치채고 도와준다.

 

 백인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며, 사토루는 20대 중반이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깍듯이 대할 필요는 없다. 사토루의 행동에서, 전형적인 예의 바른 일본 사람의 느낌이 묻어난다. 백인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해주는 사토루의 도움을 어느새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그는 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둘 사이에는 어떤 문제도 없었고, 백인의 나이가 더더욱 많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사토루를 보면서, 로드 트립 당시 Travelmate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고 외국인을 볼 때마다 호의적으로 다가가 웃겨주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래서 그는 굳이 자신에게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 백인보다, 사토루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말을 많이 건다.

 

 

 시간이 지나자 사토루도 그에게 몇몇 이야기를 한다. 한 번은 그가 사토루에게,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토루는 여자 친구는 없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다고 말한다. 누구냐는 그의 질문에, 같은 백패커스에 살고 있는 일본인 여성이라고 사토루가 답한다. 그는 잘됬다며, 어서 그 여성을 여자 친구로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사토루는 마르긴 했지만 뚜렷한 복근과, 갈라진 상체 근육을 가진 남성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사토루는 고개를 젓는다.

 

 사토루는, 자신이 마음에 두는 여성이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남자는, 함께 농구를 하는 백인이다. 백인과 해당 여성은 거의 매일 밤을 함께 보낸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한 사실 자체보다, 사토루가 그 모든 것을 너무도 담담하게 말한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다. 포기한 것인지 원래 참을성이 대단한 것인지, 사토루는 백패커스에서 백인과 자신이 마음에 둔 여성이 함께 있는 것을 계속해서 바라봐왔다고 한다. 

 

 사토루는 자신이 마음에 둔 여성의 연애 상담까지 해준 듯하다. 해당 여성은 백인과 연인 관계로 발전하길 원하지만, 백인은 육체적인 관계만을 원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사토루의 말을 들으며, 백인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 안 좋아진다. 사토루는 마음에 둔 여성이 자신에게 마음을 표한다면 언제든 사귈 생각이 있다고 말한다. 

 

 사토루는 자신이 마음에 둔 여성과 잠자리를 하는 백인과 함께 다니며 공놀이도 하고, 해당 백인에게 재빨리 담뱃불을 붙여주는 등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만일 그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었다면 사토루를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사자인 사토루의 입을 통해 너무나도 명확하고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사토루에게서, 그로써는 참을 수 없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듯한 초인적인 인내심이 느껴진다. 그는 사토루의 인내심과 순정에 감탄한다. 어느 소설에서 그랬듯, 진정한 순정과 사랑은 어떤 면에서는 비굴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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