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혼자 지역 이동을 할 때, 가족 여행을 할 때, 특히 로드 트립을 할 때 가장 많이 보였던 문구가 ANZAC이다. 내륙 지역에 깔끔하게 꾸며놓은 잔디밭, 해안가에 탁 트인 곳의 어딘가에는 반드시 ANZAC이라는 단어가 조각된 기념탑이 있다. ANZAC, Australian & New Zealand Army Corps의 약자로, 호주-뉴질랜드 합동군이란 뜻이다. 하지만 ANZAC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호주군이라는 의미를 넘어, 호주 국민들의 국가 정체성과 애국심을 상징하는 단어로도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ANZAC day는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을 기리는 날임과 동시에 호주의 가장 대표적인 공휴일이다.
호주-뉴질랜드 합동군은 세계 1,2차 대전 모두 참전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호주는 참전 용사들을 극진히 예우한다. 그는 호주를 돌아다니면서, RSL이라는 시설을 지겹도록 마주쳤다. RSL은 Returned and Services League의 약자로, 전쟁에서 돌아온 참전 용사들을 위해 마련한 휴식 장소다. 그가 골드코스트에서 한인 매니저와 만나 스테이크를 먹었던 장소도 RSL이다. RSL 내부에는 다양한 시설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스테이크와 파미 등 식사를 할 수 있는 비스트로, 적은 돈으로 놀음을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카지노(포키라고 한다), 춤을 출 수 있는 무대, 화장실, 마지막으로 1,2차 대전 당시 호주군이 입었던 군복이나 무기 등을 마네킹에 입혀 전시한 장소가 있다. 내부 시설들을 보면 알 수 있듯, RSL 건물은 꽤 넓다.
RSL은 일종의, 퇴역한 참전 용사들을 위한 놀이터이자 문화 공간이다. 도심과 근교는 물론, 웬만한 외곽 지역에도 RSL이 있다. 호주가 참전 용사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참전 용사들을 위해 만든 공간이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도 개방된다. 그가 골드코스트의 RSL을 방문했을 때, 시설 내부에서 식사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 놀음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었다. 그는 RSL을, 노인들을 위한 놀이 장소이자 클럽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 특히 젊은 세대들은 RSL에 가는 일이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이 든 노인들이 많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호주의 젊은이들은 도심의 클럽을 간다. 호주의 젊은이들은 클럽에서, 호주의 노인들은 RSL에서 여가 시간을 보내는 셈이다.
전쟁은 젊은 세대들에게서는 점점 잊혀져 가고, RSL 시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ANZAC day만큼은 남아, 아직까지도 가장 큰 기념일로 여겨진다. 호주의 가장 큰 기념일은 ANZAC day와 영국 여왕의 생일이다. 그는 왜 굳이 호주가 영국 여왕의 생일을 축하하나 의문스러웠다. 호주의 역사와 상황을 이해하면, 현재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호주의 시작은 영국의 식민지다. 그것도 일반 식민지가 아닌, 죄수들의 유배지였다. 동부 해안가의 시드니를 시작으로 브리즈번, 멜버른 등으로 유배지가 확장된다. 가끔 혹자들이, '호주라는 국가는 선조들부터가 흉악범인 나라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의 사법 체제라는 것이 현대처럼 공정하고 체계적이지 않았으므로, 생계형 범죄나 억울한 이들도 형량을 무겁게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호주 대륙에 처음 정착한 이들이 범죄자와 교도관들 위주였던 것은 사실이나, 혹자들의 말처럼 전부가 흉악범이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이주민들도 많았다.
어쨌든 호주가 범죄자들의 유배지로써 출발했으며, 초기 정착한 조상의 일부가 범죄자였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의 호주인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호주 대륙은 해안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척박한 토양이므로, 호주인들은 자신의 선조들을 개척자로 생각하며 자긍심을 가지기도 한다. 이 부분은 미국의 정서와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호주와 미국은 둘 다 영국으로부터 뻗어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영국에 대한 태도는 크게 다르다.
호주는 영국 죄인들의 유배지였고, 토양이 척박했으며, 소수의 원주민(어보리진은 수렵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다)이 있긴 했지만 무리를 이뤄 대항하지 않았다. 비옥한 토양을 두고, 위협적인 무리를 이룬 인디언들과 싸워야 했던 미국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다. 즉 초창기 호주 대륙은 아메리카 대륙에 비해, 영국에게 이득 될 것이 없었다. 탐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국 외에도 다른 열강들이 존재했으나, 탐나지 않는 호주 대륙은 다른 서구 열강이 진출조차 하지 않았다. 별 이득이 날 땅도 아니고, 원주민은 소규모라 위협적이지 않고, 경쟁할 서구 열강도 없으니 영국은 호주 대륙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호주에는 영국군이 많이 주둔하지 않았고, 소규모의 군대조차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철수한다.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으니 비용을 충당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호주에는 군비를 충당할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현지에 주둔하는 영국 군대의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우려 마시는 차에까지 세금을 물렸다가 보스턴 티 파티 사건을 계기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토양, 원주민의 저항 정도, 경쟁 관계인 다른 열강의 진출 여부, 무엇보다 영국 입장에서 이득이 날 만한 땅인가라는 이유에서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 대륙은 차이가 컸다.
영국 정부의 간섭과 압박이 적으니, 호주 대륙에 정착한 영국인들은 모국에 대한 충성심을 그대로 유지한다. 호주의 국기를 보면,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을, 남반구의 별자리가 수호하는 듯한 모양새다. 호주에 정착한 백인들은 영국의 문화를 그대로 들여와 피쉬앤칩스, 베지마이트(영국은 마마이트가 있다)를 먹고 영어도 모국과 비슷한 영국식 영어를 쓴다. 1,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호주는 영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써,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면 호주도 즉각 모국인 영국을 따라 전쟁에 나섰다.
이러한 호주의 과도한 충성스러움은, 그 유명한 '백호주의'로 이어진다. 다른 인종의 유입를 허용한 미국은 그 인종(흑인노예제)으로 인해 남북이 갈라져 전쟁을 치렀다. 자신들은 미국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영국계 백인만으로 이루어진 하얀 호주 대륙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땅에 들이긴 했으나, 계약 기간이 끝나면 즉시 추방했으며 영주권을 주지 않기 위해 영어 받아쓰기 시험을 봤다. 심지어 영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네덜란드어 받아쓰기 시험을 봤다. 그야말로 떨어뜨리기 위한 술수다.
호주의 백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호주의 영국인'으로 규정했다. 음식과 언어에서부터 외교와 공휴일까지도 영국을 따랐으며 지금도 호주의 국가수반은 영국 여왕이다. 영국 여왕의 생일을 호주에서 기념하는 이유다. ANZAC day 또한 영국에 대한 호주의 애정을 보여주는 증거다.
ANZAC day는 호주 군인들을 기리는 날이지만, 특정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전투로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군과 맞붙은 갈리폴리 전투를 꼽는다. 갈리폴리 반도에 영국군과 호주군이 함께 상륙하는 작전이었는데, 영국군 장교의 무능함으로 인해 호주군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다. 현대인의 시점으로 보았을 때는 무능한 영국 지휘관으로 인해 애꿎은 호주 젊은이들의 목숨만 상한 일이지만, 당시 호주인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호주인들에게 갈리폴리 전투는, 젊은이들이 부모님의 조국인 영국을 위해 피를 흘린 기념비적인 전투다. 갈리폴리 전투를 기점으로 호주가 탄생했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많으며, 그 의견에 동의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아직까지도 호주의 가장 대표적인 공휴일은 ANZAC day다. ANZAC day와 영국 여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호주의 모습을 보면 호주가 영국을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모국인 영국에 대한 호주의 맹목적인 효심과 충성심이 마침내 금이 가는 시점이 온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신의 안위에 실질적인 위협이 닥치면 기존의 가치관이 크게 변화한다. 호주의 경우 그 실질적인 위협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호주 대륙과 멀리 떨어진 유럽에 군사를 파견하기만 하면 됐다. 본국은 안전한 상태에서, 모국인 영국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영국이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1차 세계대전 때처럼 호주도 영국을 따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일본과 동맹이었다.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니, 자동적으로 호주와 일본은 적이 된다.
이 부분에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차이가 생긴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호주 본토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이 없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가까이 위치한 일본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도중 호주는 본토에 대한 위험을 해소하기 위해, 파견한 병사들의 본국 송환을 영국에 요구한다. 이때 영국의 수상이 바로 윈스턴 처칠이었는데, 처칠은 호주의 요구를 거절한다. 싱가포르의 영국 함대가 호주를 지켜줄 테니, 걱정 말고 병사들을 계속 영국 전장에 남겨두라는 것이었다.
호주는 불안했지만, 모국인 영국에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영국은 호주의 충성에 보답하지 못했다. 영국의 함대는 일본 폭격기에 의해 침몰했고, 일본 폭격기들은 바다 건너 하와이는 물론 호주 북부 다윈까지 폭격했다. 호주 대륙은 처음으로, 본토에 실제적인 공격을 받은 것이다. 일본은 여러 의미에서 대단한 나라다.
영국은 결국 싱가포르를 포기했고, 호주를 지켜주지 못했다. 호주는 자신들에게 닥친 실제 위험, 그 위험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모국, 심지어 군사 송환 요구까지 거절한 영국에 대한 충성심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호주는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들이 충성했던 모국 영국은 멀지만 일본의 폭격은 가깝다.
호주의 땅덩어리는 넓지만 인구는 2000만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근거리에 위치한 아시아 국가 일본의 인구는 1억이 넘으며 인도네시아는 2억이 넘는다. 인구가 넘치는 저 아시아 국가들이 호주의 땅을 노린다면, 2차 세계대전 때처럼 넘어와 직접 폭격할 수도 있다. 호주 정부는, 호주 대륙의 빈 땅을 아시아 사람들로 채워 넣는다면 근방의 아시아 강국들이 2차 세계대전 때처럼 쉽게 호주 대륙을 폭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이러한 계산에 의해 비로소 호주의 '백호주의'가 무너지고,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대거 수용하기 시작한다.
전쟁 후 많은 국가들이 폐허 속에서 일어났고, 그중 일본의 성장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지리적 위치상, 일본과 호주는 긴밀한 교역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으며 실제로 일본은 호주의 가장 큰 교역국이다. 호주는 먼 거리에 있는 영국에 충성했지만, 그 충성은 보답받지 못했고 가까운 아시아 국가들로부터의 위협을 겪었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호주는 '호주 대륙의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및 아시아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다.
영국 또한 먼 거리에 있는 호주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대영제국이라 불린 과거는 이미 빛이 바랬고, 현대에는 주변 유럽 국가들과 협력할 수밖에 없는 흐름이다. 영국이 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면서, 유럽 측 국가들과는 교역을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반대로 유럽 이외의 국가들에는 관세와 보호 조치 등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요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저서 '대변동'에서 영국과 호주의 모습을 이렇게 비유한다.
"자식이 어머니에게서 독립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먼저 자식에게서 독립을 선언했다."
물론 여기서 어머니는 영국이고, 자식은 호주다.
이민자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처럼, 호주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가 함께 일했던 아시안 웨이트리스들은 대부분 모나쉬 대학교 학생들이었고, 멜버른 중심의 대학가 부근에서도 아시안 학생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미국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아시안들의 대학 진학률은 상당히 높다. 자국을 떠나와 정착하면서 갖은 고생을 한 아시안 부모들은, 자식들에게는 그 고생을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부모들은 세탁소와 청소일을 하더라도, 그 자식들은 반드시 대학에 보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아시안이 많아질수록, 그들은 사회 고위층에 올라갈 가능성이 많아지고 실제로 많이 진출하게 된다. 이미 미국에서는 아시안계 국회의원의 모습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호주 또한 대학교와 대도시에 아시안이 많으며, 워홀 이후 영주권과 시민권 취득을 원하는 아시안도 많다. 다시말해 주변 아시안 국가로부터의 이주민 유입이 큰 편이다. 아직 옛 사고방식을 가진 호주 백인들은 호주 내에 아시안이 점점 많아지는 상황을 아니꼽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시아 대륙과 가까운 호주의 지리적 특성상,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을 타고 있다. 언젠가는 호주에서도 아시안 국회의원, 아시안 총리가 선발될 가능성이 높다. 호주가 아시아 이민자들과 함께 새롭게 정의해나가고 있는 정체성에는 '영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이라는 의식이 희박하다. 실제로 영국 여왕을 국가 수반으로 지지하느냐는 국민 투표에서 찬성을 표하는 국민들의 비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미래의 호주는 '영국의 자식'이라는 과거 정체성을 완전히 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영국 국기가 포함되어 있는 호주 국기도 바뀔 것이고, 영국 여왕의 생일도 공휴일에서 빠질 것이다. 영국을 위해 피 흘린 젊은이들을 기리는 ANZAC day의 의미도 바뀌게 될지 모른다.
참고서적 : 문명의 붕괴(제레드 다이아몬드 저), 대변동(제레드 다이아몬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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