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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247 -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그는 세컨드 비자를 취득하지 않았다.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하다는 것이 그가 호주에서 내린 결론이므로, 호주에서 굳이 1년을 더 보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비자 만료 날이 점점 다가오자, 그는 호주도 아쉽고 워킹홀리데이도 아쉽다. 무엇이든 떠날 때가 되면, 기억들은 미화되고 아쉬움도 커진다.

 

 

 그는 유튜브에서, 다른 사람들의 워홀 관련 영상을 본다. 비자 만료가 다가올수록 더욱 많이 본다. 그가 본 유튜버 중에는, 아예 대학을 가지 않고, 20대 시절을 워킹홀리데이 생활만 하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호주/아일랜드/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들에서 연달아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하며 생활력과 적응력 및 영어 실력을 기르고, 이후 대만이나 일본 등 다른 국가에서도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이어나가는 영상이다. 그는 해당 영상을 보며, 20대 시절을 나름 보람차게 보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해당 영상들을 보며, 그는 이런 유튜버들을 따라 해볼까 생각한다. 1년간의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통해 홀로 지내는 생활력, 영어, 도전 정신 등 많은 것을 터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나라에서, 더욱 보람찬 워킹홀리데이를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자신이 유튜브에서 본 워킹홀리데이 영상, 그리고 케언즈에서 매일같이 보는 일본인들의 영향을 받는다. 영어권 국가에서의 워킹홀리데이는 호주 1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본에 워킹홀리데이를 가보고 싶다. 일본인들도 한국인과 사고방식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외모는 상당히 비슷하다. 그가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문화에 익숙해진다면, 정말로 일본인들 속에 녹아들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그의 외모는 서양인보다는 일본인과 더 비슷하다.

 

 그는 내친김에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알아본다. 일본에 더해, 캐나다 워킹홀리데이까지 알아본다. 두 나라 모두 호주보다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기가 어렵다. 호주는 워킹 비자 발급 인원에 제한이 없지만, 캐나다는 인원 제한이 있으며 일본은 워홀 계획서까지 일본어로 세세하게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시간도 많겠다, 그는 괜히 일본어 공부도 해보고 일본과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영상을 찾아본다. 찾으면 찾을수록, 하나같이 쉬운 것이 없다. 그는 1년간의 워홀을 통해, 외국 생활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파악했다. 일본이나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라고 해서 호주보다 쉬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다시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디면 정착부터 일자리 찾기까지의 고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워킹홀리데이 초창기의 고생 패턴이 훤히 보인다. 그는 자신이 왜 갑자기 일본과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찔러보고 있는지 그 이유를 파고든다.

 

 이유는 별 것 없다. 너무나도 간단하다.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솔직하기만 하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이유, 바로 도망이다. 그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어떨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대학교 수업, 졸업, 취업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을 것이 분명하다. 왠지 따분할 것 같고, 반항하고 싶고, 그만큼은 이런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외치고 싶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다름을 증명하고자 호주에서 1년간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했다. 워킹홀리데이 기간 동안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일하며 열심이었던 점은 자부하지만, 이로부터 인생의 진로를 찾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길을 찾지 못했다.

 

 

 호주에서 그는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자신이 꿈꿔온 요리도 해봤고, 건설현장 일도 해봤다. 즐거운 때도 많았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가 되면 그도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막상 직접 해보니, 주방이나 건설현장에서 바쁘게 평생을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 마냥 설레고 기쁘지만은 않았다. 일이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항상 멋있고 전문적이고 보람찰 수는 없다. 새롭고 즐거울 때도 있지만, 지루한 반복과 인내의 시간이 대부분이다. 이 점은 어떠한 일이든 동일하게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이다. 그는 요리나 건설현장 일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기 때문에, 어떠한 지루함과 고됨도 즐겁게 느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해보았고, 그중 자신의 인생 직업으로 연결시키고 싶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즉, 자신만의 길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해답은, 빨리 한국에 돌아가 그가 걸어왔던 길에 복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일본이나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기웃거리고 있다.

 

 

 일본 워킹홀리데이,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검색하면서도 그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불편함, 명백하게 정해져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함으로부터 느껴지는 불편함이다. 그는 어느 만화의 주인공이 말한 명대사가 떠오른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애써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는 사실 한국에서 도망쳤던 것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호주, 어렴풋하게나마 낙원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호주는 낙원이 아니었다. 워킹홀리데이 기간 중, 그는 온몸으로 호주가 낙원이 아님을 깨달았다.

 

 해당 만화의 주인공이 한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실제로는 이어지는 대사가 더 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도착한 곳에는 또 다른 전장(전쟁터)이 있을 뿐이다. 이곳은 나의 전장이다. 너의 전장으로 돌아가라."

 

 그가 온몸으로 부딪힌 호주는, 그야말로 전장이었다. 그가 도망친 한국도 전장이고, 도망쳐서 도착한 호주도 전장이다. 그렇다면 도망친 의미나 실효성은 어디에 있나. 그는 도망쳐서 도착한 호주라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이 정도로 노력할 바엔 차라리 한국에 남아있던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호주에서의 노력과 경험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부딪히고 살아가는 과정은 나름대로 그를 성장하게 해주었고, 또한 그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세상 어느 곳이든 살아가는 것은 비슷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버리고 도망친 사람에게는 결코 낙원이 존재할 리 없다는 깨달음이다.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이제 그동안 부정해온 것들을 직시해야 한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그는 자신이 도망쳐온 것들, 자신의 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낀다. 더 이상 도망치는 것은 그만둘 때다. 그는 일본과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계획을 폐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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