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두 번 연속의 이상한 경험으로 인해 힘이 빠져 있는 상태다.
기껏 준비해 간 PT를 열정적으로 까고, 면접비도 없고, 결과 통보 없이 대놓고 공고를 다시 올렸던 10번째 기업
검은 머리 외국인에게만 질문을 하며 대놓고 병풍 면접을 한 11번째 기업
저번 해의 마지막과, 이번 해의 첫 면접이 연속으로 이러니 그는 영 기운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취업을 해야 하므로, 그는 계속해서 서류를 지원한다. 하지만 취준생 초창기의 순수한 열정과 패기는 이미 반감된 상태다. 그는 좀비처럼, 빛을 잃은 눈으로 이력서를 난사한다. 생각을 멈추고 반복하는 복사-붙여넣기, 그는 무엇인가를 내려놓은 듯한 심정이다. 그런 시기에, 갑작스레 보험사의 공고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보험사 채용 시즌인가 보다. 그는 보험 쪽은 관심도 없고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리 가치 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치가 무슨 소용인가. 어디든지 붙기만 하면 감지덕지인 그다. 어차피 복사-붙여넣기이니, 그는 약간의 품을 더 들여서 보험사에도 지원한다.
12번째 기업은, 그가 이력서를 난사한 보험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를 서류 합격시킨 곳이다. 서류 합격 메일을 받은 그는 약간 기쁘긴 했으나, 내심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의 이력서는 원래 제조업체 해외영업 직무나 제조업체 기획 직무 지원을 염두하고 작성했다. 다양한 기업에 난사하기 위해 그가 의도적으로 업계나 직무 색깔을 흐려놓긴 했지만, 어쨌든 그가 날린 이력서의 원래 방향은 제조업체 해외영업/기획이다.
그런 이력서를 거의 그대로, 보험사인 12번째 기업에 지원했는데 서류가 덜컥 합격이 되어버렸다. 예전의 그였다면 이력서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챈 것이리라며 마냥 기뻐했겠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다. 이력서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대강 서류만 합격시킨 것은 아닐까. 아예 그냥 면접 들러리를 세우려는 것은 아닐까.
이전의 경험들로 인해 약간은 염세적으로 바뀌었으나, 어쨌든 그의 현실은 취업준비생이다. 12번째 기업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억지로, 보험사인 12번째 기업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보험사여서 그런지, 12번째 기업은 매출과 영업 이익이 엄청나다. 지금까지 면접에 참석했던 기업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1위로, 매출이 조 단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실제 실물을 제조하는 것도 아닌데, 역시 돈놀이가 최고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것은 아니구나,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12번째 기업은, 서류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AI 면접이라는 것을 실시한다. 실제 면접을 보기 이전에, AI면접으로 지원자들을 한 번 더 걸러내는 것이다. 그는 이전까지 AI면접을 실시해본 적이 없다. 서류 합격은 12번째이지만, AI면접은 처음인 것이다. AI면접이라니, 이름만 들어서는 굉장히 신기술을 사용한 고급 전형일 것 같은 느낌이다.
당시는 AI면접이 막 도입되기 시작해서, 검색을 해도 정보가 별로 없는 시절이었다. 그도 AI면접을 검색해서 찾아보았으나, 후기 자체가 그리 많지 않으며 내용도 천차만별이다. 실제로 인사담당자들이 일일이 다 모니터링하므로 실제 면접처럼 정장을 입고 실시해야 된다는 후기도 있고, 그냥 정부에서 시켜서 하는 형식적인 절차이니 잠옷 입은 채로 세수도 안 하고 실시해도 합격에 지장이 없다는 후기도 있다.
중구난방인 후기들을 읽으며, 그는 왠지 이 AI면접이라는 것이 별 실효성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는 그의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며, 괜히 헐렁한 후기를 믿고 AI면접을 대충 실시했다가 떨어져도 탓할 사람은 그 자신뿐이다. 그는 별로 내키진 않지만, 첫 AI면접이니 정장을 입고 긴장한 상태로 실시한다.
AI면접
12번째 기업은, 서류 합격 메일에 AI면접 링크를 첨부해놓았다. 마감 날짜는 대략 5일 후로, 마감 전까지만 해당 링크를 타고 들어가 AI면접을 실시하면 된다.
AI면접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컴퓨터, 웹캠, 마이크가 필요하다. 인공지능 면접관이, 지원자의 얼굴과 목소리를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에 비대면 면접을 실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다행히도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다. 대단한 장비들은 아니지만, 구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지원자들은 장비 구비에 노력과 비용과 시간을 써야 할 터다. 그는 AI면접을 실시하며 새삼, 앞으로는 노트북이나 컴퓨터가 없으면 취업하기도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실시했던 AI면접은, '마X다스'라는 회사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이다. 그는 처음이라 이때는 몰랐지만, 당시 AI면접이라고 하면 백이면 백 전부 '마X다스' 회사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가져다가 사용했다. 회사마다 AI면접 진행을 위해 링크를 보내는데, url 주소의 기본적인 골격이 거의 90% 동일하다. url 주소 중 구별이 되는 부분은 맨 마지막의, 프로그램을 빌려 쓰는 회사의 이름이 들어간 곳뿐이다. 그는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써보자면 이렇다.
https://www.AI면접.마X다스제작.@#$!#$@%.12번째기업
https://www.AI면접.마X다스제작.@#$!#$@%.13번째기업
이런 식이다. 주소만 봐도, 똑같은 AI면접 프로그램을 여러 회사들이 똑같이 빌려다가 쓰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미래에 그는 AI면접을 꽤나 자주 보게 되는데, 그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경험한 모든 AI면접의 화면 구성, 화면 색깔, 안내 목소리, 면접 구성, 면접 질문이 거의 95% 이상 똑같다. 이때의 그는 잘 모르고 있지만, 미래의 그는 똑같은 AI 면접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진행하느라 꽤나 고생하게 된다.
그가 경험한 AI면접의 순서는 이렇다.
0. AI면접 시작 전 : AI 목소리의 안내 - 카메라, 마이크 점검 - 얼굴 인식 - 몸풀기 질문 (좋아하는 음악 등)
1. 시작, 기본 질문 : 자기소개 - 원하는 직무와 지원 동기 - 자신의 강점과 약점
2. 인성 검사 : 주어지는 질문에 얼마나 동의하느냐 클릭하기
3. 상황 대처 질문 : 직장 상사와 갈등 있으면 어떻게 해결할 거냐, 동료가 이러이렇게 하면 어떻게 할 거냐
4. 전략 게임 : 표정 보고 감정 알아맞히기 - 카드 뒤집기 - 날씨 알아맞히기 - 공 무게 나열하기 - Nback game - 마우스 재빨리 움직이고 클릭해서 날아오는 모양 맞추기 - 고리에 공 끼우기
5. 심화 질문 : 감정보다 이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예 아니오로 말하세요 -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설명하세요 - 실제로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결과가 어땠나요?
질문의 내용은 AI면접을 진행하는 시기나 사람에 따라 약간씩은 다르다. 하지만 AI면접 프로그램 내에 이미 질문들이 세팅되어 있는지, 질문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으며 전체적인 골격은 동일하다.(그가 AI면접을 실시하던 시기 '마X다스'의 프로그램은 그랬다)
AI면접은 처음 자리에 앉기부터, 끝내기까지 최소한 50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가 특히 참을 수 없었던 점은, AI 목소리의 안내나 대기 시간 등 그가 스킵할 수 없는 시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뻔한 내용이어도, 안내가 끝나기 전에는 스킵할 수 없고 끝까지 다 듣고 있어야만 한다. 카메라가 내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듣기 싫다고 자리를 비웠다간 안면 인식이 안 되어 불합격 처리가 될 수 있다.
안내에 더불어 그를 더욱 미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4번, 6개의 전략 게임이다. 그가 AI면접을 진행하면서, 가장 시간을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바로 이 전략 게임들이었다. 한 게임당 최소한 3~5분이 배정되어 있어, 해당 시간을 전부 소요해야지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첫 AI면접인데도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는 그다. 미래에 여러 번 반복될 AI면접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다.
AI면접이 전혀 쓸모가 없는 형식적인 절차였던 것인지, AI가 그를 높게 평가한 것인지, 그는 12번째 기업 AI면접까지 합격한다. 12번째 기업은 그에게 면접 안내 메일을 발송한다. 그는 면접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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