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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42 - 버스, 자연

 버스는 브리즈번 남쪽으로 달린다. 페스티벌이 열리는 장소는 브리즈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브리즈번이 속한 퀸즐랜드(Queensland,QLD) 주의 끝자락이다. 퀸즐랜드 주와 뉴사우스웨일즈(NSW, 시드니가 속한 주) 주의 경계를 향해 버스는 달린다.

 

 호주에 도착한 뒤로, 계속 브리즈번 중심지에만 머물렀다. 가끔씩 자전거로 나가봤자 브리즈번 외곽 정도였던 그다. 그런 그가 버스를 타고, 3시간 가까이 걸리는 새로운 장소로 가고 있다. 왠지 모를 설렘이 느껴진다. 

 

 그는 원래부터 버스, 비행기, 기차 등을 좋아했다. 특히 그가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경우는 그 설렘이 배가되곤 했다. 이는 그가 가진 특이한 인식 때문인 듯하다. 그는 교통수단 안에서 보내는 이동 시간을 '버려지는 시간'이라고 인식한다. 비행기나 기차, 시외버스의 경우 출발 시간과 도착 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시간은 누구나 똑같이 버려야 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가 인식하는 '버려지는 시간'은 결코 부정적인 어감이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되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시간이다. 더 나아가, 혹시라도 이 버려지는 시간에 무엇이라도 한다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어차피 버려질 터였던 시간에 성취를 이룬 셈이 된다. 그래서 그는 장거리 교통수단 내에서 보내는 시간에 생각을 비우거나, 책을 봤다. 어차피 버려지는 시간이니, 마음을 비우고 편안히 보내거나 아니면 조그마한 성취라도 이루어 이득을 보았다는 느낌을 가지기 위해서다.

 

 그는 간만에 찾아온 '버려지는 시간'이 여유롭고 달다. 이러한 '버려지는 시간'은, 호주 도착 후 바쁘게 살아온 키친핸드 생활을 떠올리며 더 만족스러워진다. 진정한 여행라고 말하긴 했으나, 그 자신도 무엇을 찾아서 먼 타국에 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쨌든 오고 말았으니, 호주에 도착한 이후 어떠한 방면에서든 본전을 뽑아내겠다며 치열하게 살았다. 그는 지금의 '버려지는 시간'에 즐기는 여유가, 그간의 생활에 대한 타당한 보상으로 느껴진다.

 

  

 버스는 계속 달린다. 도로는 어느새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국도다. 브리즈번이 조금이나마 보이더니, 결국 모든 고층 건물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고층 건물은 물론 건물이 아예 없고, 인적조차 드물다. 건물과 사람이 없어진 자리를 넓은 평원과 언덕들이 대신한다. 그는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인간의 발자취가 덜한 자연을 보곤 했다. 버스를 둘러싼 호주의 자연도 얼핏 비슷해 보였지만, 보면 볼수록 다르다. 한국은 산이 많고, 평지는 대부분 논과 밭이며 지평선이 잘 보이지 않는다. 호주는 한국과는 크기부터가 다른 대륙이다. 그가 가는 길은 산이 그렇게 많지 않고, 크고 작은 언덕이 산재하며 저 멀리 지평선이 깔려 있다. 버스는 가끔은 언덕을 우회하고, 가끔은 언덕을 타 넘는다. 언덕을 지나고 나면 다시 넓디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호주에도 논과 밭이 존재하긴 하겠으나, 평야는 대부분 목장이다. 양과 말, 소가 많이 보인다. 캥거루는 보이지 않는다. 양, 말, 소는 아득히 먼 지평선을 배경으로 풀을 뜯고 있다. 하늘은 구름이 적고 맑아서, 햇빛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그는 이 광경을 보며, 그야말로 호주의 대자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버려지는 시간' 동안 호주의 대자연을 눈에 담는 것조차도 보람찬 경험이며, 나름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버려지는 시간'이 이처럼 알차게 채워질수록, 그는 기분이 더 좋아진다. 그렇게 약 3시간 정도 달리자, 자동차와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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