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다니는 육가공 공장은 에이전시를 통해 인력을 채용한다. 에이전시 본 사무실은 공장과 떨어진 도심에 위치하고, 필기검사 - 신체검사 - 각종 서류 작업을 수행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공장 입사 이후에도 에이전시는 노동자들의 현장 투입과 급여 등 노무를 전담한다.
에이전시는 도심과 공장, 두 곳에 사무실이 있다. 도심 사무실은 공장 입사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공장 취업에 필요한 일련의 과정들을 도와주고 돈을 받는다. 공장 사무실은, 그렇게 서류 작업을 끝마치고 대기 인력이 된 이들의 각종 노무 및 급여까지 관리한다.
도살이나 발골 기술을 가진 인력들, 슈퍼바이저와 관리자 직급들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와 같이 기술이 없고 대규모로 채용되는, 주로 워홀러들인 Process Worker(일반 노동자)들은 에이전시를 통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에이전시에 이야기한다. Process Worker가 공장 본사와 직접 소통하는 일은 거의 없다.
새롭게 투입되는 Process Worker들은 기존 노동자들의 빈자리에 투입되는데, 에이전시가 다리 역할을 한다. 인력이 필요한 파트의 슈퍼바이저(관리가)가 에이전시 사무실로 전화를 한다. 그러면 에이전시 사무실의 직원(필립 등)이 전화를 받고, 공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인원 중에서 필요한 수만큼 뽑아 해당 파트로 데려간다. 공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인원이 부족할 경우에는 에이전시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리스트의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부르곤 한다. 오전조나 오후조가 일을 시작할 때에 가장 인원 수요가 많으므로, 필립과 에이전시 직원들은 인력 인솔을 위해 공장을 계속 들락날락한다.
그가 일하는 육가공 공장의 인적자원관리 체계는, 이처럼 실제 일을 하는 부서와 인력을 수급하는 부서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 말은, 두 부서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 사례를 몸소 겪었다. 그가 말도 하지 않고 결근한 당일, 에이전시에서는 도리어 전화가 와서 오늘 일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에이전시는 그가 결근했다는 사실은 물론, 고기 포장 파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당연하다. 에이전시가 관리하는 인원이 못해도 수 백을 훌쩍 넘을 텐데, 그 인원들의 상황을 모두 꿰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공장 내의 실무 파트도 항상 바쁘고 인력의 공백은 일상적인 것이다. 관리자와 싸우거나 큰 사고를 치지 않는 한, 관리자는 에이전시에 자세한 피드백을 주지 않을 것이다. 바쁜데 에이전시에게 복잡하게 여러 말할 것 없이, 그저 오늘 빈자리가 났으니 1명을 보내달라고 하면 될 일이다.
그는 에이전시의 사무실이 공장 본 건물과 떨어져 있는 것, 인솔을 제외하고는 필립과 에이전시 직원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이 사무실에서 지내는 것을 보며 감이 왔다. 눈치가 빠르지 못한 그였지만, 이때의 판단만큼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는 필립을 포함한 에이전시 직원들과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고기 포장을 하면서, 일을 열심히 할수록 더 손해를 본다는 공장 내부의 법칙을 깨달은 그다. 공장 내에서는 귀마개를 껴서 수다나 잡담도 힘들고, 톱니바퀴처럼 일을 하기 때문에 일의 전문성이나 성취도 없다. 그는 공장 내부의 사람들, 그리고 공장 일 자체에 애정이 없다. 하지만 공장은 이미 그의 주 수입원이 되어버렸고, 다른 직업보다 돈을 많이 준다.
그는 공장 일에 애정도 없고, 열심히 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돈은 필요하므로, 당장 공장에서 일은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붙잡아야 하는 줄은, 공장 내부가 아니라 인력 투입을 전담하고 있는 에이전시 직원들이다. 에이전시 직원들은 그가 공장 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는다. 그의 근무 태도가 불량하거나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공장 내부(관리자)는 에이전시에 피드백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널널하게 일하거나 무단결근을 해도, 관리자의 눈밖에 나거나 화가 나는 그 선만 넘지 않는다면, 그는 에이전시 직원들과 다진 탄탄한 관계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영악한 것이었다. 잘 돌아가고 있는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굳이 비집고 들어가, 시스템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는 시스템이 너무 완벽하면 이용할 여지조차 없지만, 이 육가공 공장의 시스템은 조금은 허술하고 인간적인 측면이 있어,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는 이제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고, 힘든 파트가 걸리면 하루 경험해보곤 다음날 결근하고 다른 파트로 간다. 쉬운 파트는 기존 인력이 잠시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므로, 그는 며칠 일하다가 다시 대기 인력이 되었다. 그러면 필립은 그에게 새로운 파트를 또 소개해줬다. 필립과 그는 날이 갈수록 친해지고, 그도 이런 대기 인원 생활이 마음에 든다. 대기 인원들의 불안은, 일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부분이 가장 크다. 그는 대기이지만 일을 받으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고, 또 매일 일을 했다. 매일 일을 할 수 있다면, 한 파트에 묶이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대기 인원인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그다. 어차피 공장 노동자의 일은 단순 반복이다. 그렇다면 파트라도 바꿔가면서 일하는 편이 덜 지루하고, 적응하는 맛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공장의 모든 파트와 장소들을 다 돌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며, 일종의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공장 입장에서는 그가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인력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파트 관리자들이 그의 이름을 외울 이유조차 없을 만큼 평범하게, 특색 없이 일하면서 그 나름의 공장 투어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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