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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호주

52 - 공장(2)

 공장의 성비는 반반이다. 칼을 쓰거나 힘쓰는 파트에는 남자 워커가 많다. 하지만 여성 워커들의 일이 힘을 덜 쓴다고 해서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여성 워커들은 주로 박스 포장이나 분류 작업 쪽에서 일한다. 도살이나 발골에서도 여성 워커가 보이기 하나, 많지는 않다.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감수하고 분류해보자면


 남성 - 가축 몰이, 도살, 발골, 맨손으로 고기를 만지거나 힘쓰는 일 등에 주로 분포 여성 - 포장, 박스, 장갑을 끼고 만져야 하는 가공 육류 등 비교적 섬세하고 주의를 요하는 일에 주로 분포


  남성과 여성 중 누가 더 힘든 일을 하는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성별이 뚜렷이 구분되는 파트보다 구분되지 않는 파트가 더 많다. 그는 여러 파트를 돌아다니는 대기 인원으로, 남성들과도 함께 일해보고 여성들과도 함께 일해보았다. 그의 개인적 성향상, 힘쓰는 일이 차라리 편했다. 그는 계속해서 주의를 요하는 일이 오히려 더 피곤했고, 그런 일들을 묵묵히 해내는 여성 워커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여러 파트를 돌아다니고 있으나, 여전히 그는 공장일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 새로운 파트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일한다는 느낌에 처음에는 설레지만, 일을 시작하고 30분만 지나면 곧바로 지루함이 찾아든다. 컨베이어 벨트나 기계 앞에서 계속 서서 손을 움직여야 한다. 정신을 놓고 손만 움직여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컨베이어 벨트와 기계는 영특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공장일은 정신을 놓고 쉴 수 없는 정도, 딱 그 정도의 주의력을 지속적으로 요한다. 그는 공장에서 몸이 피로하기보다는 정신이 더 피로해짐을 느낀다. 어서 교대 시간이 되길 바라지만 시간은 더디게 흐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 정도면 꽤 오랫동안 일을 한 것 같은데 하며 시계를 볼 때면 항상 10~15분이 지났을 뿐이다.


 그가 경험했던 일 중 최악의 일은, 공장 한가운데 있는 기계에 올라가 컨베이어 벨트를 바라보고 있는 일이었다. 이 일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꿀'이라고 소문이 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컨베이어 벨트를 보고 있는다. 박스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계속 지나간다. 가끔씩 어떤 박스가 컨베이어 벨트 중간에 끼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다가가서 손으로 툭 밀어주기만 하면 된다.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문제는, 공장 내에 딱 하나 있는 벽걸이 시계가 바로 눈앞에 위치해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곳에 서서, 컨베이어 벨트와 시계를 번갈아 바라본다. 컨베이어 벨트를 계속 보고 있다가, 박스가 오지 않을 때면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바라본다. 시간을 인식할 때마다 그는 미칠 것 같다. 시간이 도무지 바뀌질 않는다. 판타지 소설에 나올 법한 '시간과 공간의 방'에 갇힌 느낌이다. 공장 내부는 고기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냉장고와 같이 추운 온도를 유지한다. 그는 자신이 추위에 약하다는 사실을 이 공장에서 처음 알았다. 다른 이들은 반팔에 작업복만 입고도 멀쩡한데, 그는 온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움직임이 많지 않아 몸은 춥고, 귀마개를 껴서 귀는 잘 안 들리고, 시간은 도무지 흘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다른 직원들이 꿀이라고 한 일이, 그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진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돈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상상을 수십수백 번 반복한다.


 일은 맞지 않고,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최소한의 주의력을 계속 요하니 잡생각이 많아진다. 그는 시계를 계속 바라보다가 문득 슬픔에 빠진다. 무언가를 성취해보겠다고 머나먼 호주까지 워킹홀리데이를 왔는데, 지금 자신은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공장 노동자, 워홀러가 같다.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시간과 돈을 등가교환하고 있다. 특별한 기술이나 부가가치가 없는 워홀러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가진 노동력과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워킹홀리데이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은 결국 그 돈에 상응하는 시간을 갖다 바쳤다는 말이다. 당연하게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잡생각을 하고 있으니, 시간이 살짝 빠르게 흐른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와 같은 공장 노동자들이 소리 없이,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공장 노동자들의 끈기와 인내에 감탄한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공장 노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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